“광양, 이제는 고향에 봉사할 차례입니다”
“광양, 이제는 고향에 봉사할 차례입니다”
  • 귀여운짱구
  • 승인 2007.04.05 10:25
  • 호수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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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부 산은캐피탈 상근감사위원
 
삶의 진로 선택케한 청소년시절
 
진상면 비평리 비촌마을이 고향인 황호부(63) 산은캐피탈 상근감사위원.
그가 되짚는 ‘고향 광양’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신을 키워준, 그래서 고향을 빛내고 이제는 귀향해 자신의 역량을 고향을 위해 바치겠다는 남다른 애향심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1945년 8월 15일 지금은 수어댐으로 변한 ‘날몰’에서 태어나 63년에 진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임학과를 다니면서 산사람이 되는게 꿈이었어요. 산에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이 강산을 푸른 동산으로 만드는 것이 저의 작은 소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대학 4학년 때 취업문제가 대두되면서 고민을 하던 중에 지도교수의 권유 등으로 교수가 되기로 마음먹고 대학원을 진학했다. 대학원은 전체수석으로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67년 3월, 다니던 대학원을 휴학하고 학군단 육군포병장교로 군대를 갔어요. 그때 학훈장교들과 교분을 쌓았는데 시야가 넓어져 꿈 또한 커지더군요. 그러다 보니 어릴적 꿈은 군 제대후 달라져 행정고시에 매달렸죠.”

70년 9월 제9회 행정고시(재정직)에 응시한 황호부 향우는 광주지역에서 500명이 응시 1차 2명을 선발하는데 1명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았으나 72년까지 3년동안 내리 1차에만 합격하고 2차에는 떨어지는 쓰라린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꿈이 사라지는 줄 알았죠. 상실감도 컷죠. 그러던 찰나에 감사원에서 4급을유(지금의 7급)공개채용 공고를 보고 응시한 결과 5천명의 응시생 가운데 80명이 합격했는데 그중 4등으로 합격을 했죠. 그래서 공직생활의 대부분을 감사원에서 하게된거죠.”
 
감사통으로 이름 날린 황호부
 
광양사람 황호부는 산골마을 출신으로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 단단해지는 쇠처럼 세월이 모질수록 그간의 공직생활을 하게된 어려움을 일로 승부한다. 그만큼 황호부의 공직생활에 대한 열망은  더 강렬했던 모양이다.
“감사원에 73년 2월 15일 임용돼 2004년 6월 11일 명예퇴직할때까지 만 31년 4개월을 이곳에서 보냈죠. 내 청춘을 다 바친셈인데 지금도 그때를 잊지못해요.”

그는 감사원시절 부감사관(사무관)에 오르는 데는 누구보다 일찍 승진했다. 당시 자신의 출신과 학벌을 만회하기란 열심히 일하는 게 최선으로 여겨 말 그대로 자나깨나 일에 전념했다. 그런데 감사관(서기관)승진부터는 출신과 학벌 그리고 배경이 어느정도 작용한다는 당시의 분위기에 편승해 순간의 서운함도 있었지만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것은 또다시 일로 승부하는 길밖에 없다고 여겨 미처 못한 일은 보자기에 싸고 집에 가 밤이 늦도록, 그리고 일요일도 없이 일에 매진했다. 그 결과 감사관-과장-부이사관-심의관-이사관까지 올랐으니 말 그대로 진상 촌놈(?)이 출세를 한 것이라고 본인 스스로도 스스럼없이 말한다.

“1899년 황영시 원장이 감사원장으로 있을때입니다. 당시 저는 부감사관(사무관)으로 산업은행대한 감사업무를 담당하며 정기감사에 임했는데 그때 해운업계 경기가 아주 어려웠어요. 또한 정부는 선복량 과다 등으로 도산되는 해운업계가 비일비재하자 ‘해운산업합리화’라는 이름을 내 걸어 강제 구조조정에 들어갔죠.

그중 모 해운소속 A선박을 다른 회사인 모 해상으로 인수·합병을 하는 과정에서 산업은행은 A선박에 대한 부가가치를 대출당시 135억원에서 22억원으로 책정해 원금 130억원은 20년동안 무이자로 상환토록 했어요. 그런데 그 선박은 대출 한달만에 태풍으로 인해 부산 앞바다에 좌초돼 인수합병한 모 해상은 135억원이라는 거액의 보험금을 받아 삼켜버린 사건입니다.”

이때 황호부 부감사관은 산업은행이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는 것에 감사의 칼날을 곧추세웠다. 당시 모 해운회사는 횡재를 하고 쾌재를 불렀지만 이를 안 황 부감사관은 가만 있을리 만무했다. 그 선박은 135억원의 보험금을 수령했지만 은행에 설정된 사실을 알고 약정을 꼼꼼히 살펴본 결과, 선박이 운항 중 작은 사고로 선박을 수리할 때는 보험금을 소속 회사가 수령케 돼있지만 이 해운회사는 이를 전파로 둔갑시켜 거액의 보험금을 냈던 것이다.

“저는 그때 국제변호사 등의 자문을 받아 수령한 보험금 135억원을 산업은행에 돌려주도록 시정조치했죠. 그러나 그 회사는 소송 결과를 보고 처리한다며 버티는 데 이를 보고 참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 회사 그룹 소속 대출금 전체를 동결시키도록 조치하자 그때서야 수령한 보험금을 돌려준 기억이 생생힙니다.”
사례 두 번째. 93년 초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회창씨가 감사원장으로 부임해 왔다. 국방부장관은 권영해씨. 김영삼 정부는 당시 군 실세인 ‘하나회’를 숙정하기위해 이른바 ‘율곡감사’를 진행한다. 당시 이사건은 말 그대로 자고나면 율곡감사로 인해 별이 우수수 떨어지는 건국이래 최대의 많은 별들이 지는 해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이회창 원장은 부임하자마자 첫 감사의 칼날을 ‘율곡’에 겨냥했는데 저는 과거 부감사관을 지낼때 4년동안 군에대한 감사를 한 적이 있어 당시 율곡감사반에 첫 주자로 뽑혔어요.
감사인력은 100여명으로 감사관(서기관)10명이 차출돼 사업별 감사를 진두지휘했죠. 저는 전차에 대한 감사팀장을 맡았는데 소속 팀원은 7명으로 구체적인 것은 군사 기밀이라 지금도 밝힐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개괄적인 것은 하나회 소속 장교 명단을 토대로 각 사업에 관여한 정도와 부조리에 연루된 정도에따라 개인계좌 추적에 나섰어요. 그 결과 방위산업체나 군납 업체에서 돈이 흘러들어 온 정황을 확인하고 사안에 따라 사표를 받기도 하고 군검찰에 고발해 군을 떠난 장성이 수십명에 이르러 자고나면 별이 우수수 떨어진다는 당시 상황은 긴박하고 살벌한 그자체였다”고 회고한다.
 
고향에 내려가 봉사하는 일 남아
 
황호부 향우는 마지막으로 나를 키워주고 길러 준 고향 광양에 내려와 봉사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오는 6월이면 산은캐피탈 상근감사위원을 끝으로 고향에 내려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위해 바치는 것이 마지막 보답이라고 여긴다”며 30여년 감사원에서 소중히 얻은 공직생활의 경험을 고향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고 전했다.

“1900년대 조국이 일본제국의 침략으로 백척간두에 서있을때 의병을 일으켜 한평생 조국광복을 위해 살신성인한 독립투사 황병학 할아버지의 뜻에 조금이라도 보답키 위함도 고향으로 내려오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비록 현재 몸은 서울이라는 타향에 있지만 늘 마음은 포근하고 따뜻한 고향 광양에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