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6. 봉강면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6. 봉강면
  • 광양뉴스
  • 승인 2013.10.07 09:28
  • 호수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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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 최산두 선생과 매천 황현 선생의 얼이 서린 곳

신재 최산두 선생 묘비 사진 = 광양시

지형과 위치  

봉강면은 광양읍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길게 형성돼 있고 동쪽은 옥룡면과 인접해 있다. 서쪽은 순천시 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광양읍과 접해 있어 석사리ㆍ지곡 주민들은 생활 터전이 광양읍민과 같은 조건으로 살아가고 있다.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지형으로 인해 도로 마저 개울을 따라 남북으로 외길이고 구례와 내왕할 수 있는 달뜨기 재(峙)가 있었으나 지금은 터널을 만들고 포장도로로 변했다.

석사리는 앞 구 도로를 이용해 서쪽은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고 관리들이 취임할 때 영접과 퇴임할 때 송별하던 서소정(西笑亭)이 있다. 이는 도로 곁이 본 위치였으며 조금아래 입비《현감 강석영 영세 불망비》가 있으니 광양의 관문임이 확실하다.


역사적 발전과 생활상

봉강면 서석 마을에서 구석기시대 후기 유물인 석기가 발견되었으며 이 지역에 지석묘 군이 산재해 있으며 무려 36기가 있다. 광양현에 속해 있었다는 기록을 여러 곳에 있으며 1760년 광양현이 12면을 관할하는 호구 수와 남녀인구수를 기록할 때 며내면이었으며 호구총수에는 호구 248호, 인구 932명으로 수록돼 있다.

이름이 최초로 문헌상에 기록된 것은 1789년 며내면으로 6촌(사직촌, 석현촌, 지곡촌, 당저촌, 봉서촌, 저곡촌)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며내면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칙령 제98호 지방제도 개정에 의거 지명이 개칭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름이 정식으로 봉강면이라 한 것은 188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봉강에 속한 리가 자연리 37리에서 법정리 7리로 통합되었다는 것은 총독부령 제111호 면ㆍ리ㆍ동 일람에서 찾을 수 있다.

1961년 백운저수지 축조로 봉당리 조양마을, 지곡리 작정마을, 당저마을 일부가 수몰됐다. 특히 봉강 지역에는 비봉산을 비롯해 봉계ㆍ상봉ㆍ하봉ㆍ봉당ㆍ봉양재 등의 봉자가 많이 들어간 것은 특출한 인물이 배출된 것과 연류가 있다고 믿어진다.


살기 좋은 곳으로 부상

지난날의 농담이지만 평지에 사는 읍내사람들은 조령 골 사람을 보면 친구마저 산중 놈 봤다고 놀리는 것이 보편적인 정서이기도 했다. 멀고 험한 길에 짐을 지고 내려왔기 때문에 정감으로 나누던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대접을 받고 있다. 석사지구는 오래전부터 하우스에서 각종 채소를 생산해 대도시로 반출됨으로 농가 소득이 우월했고 근년에는 산을 이용한 과일을 다량으로 생산해서 부농이 되고 있다.

특산지로 자리 매김한 복분자ㆍ매실ㆍ밤ㆍ감 등은 맛이 특출하다. 성불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기름진 상ㆍ하봉 들은 오곡을 풍성하게 생산해주고 있다. 

 

매천 황현선생 사당 사진 = 광양시


유물의 명소

봉강면에 보존 된 문화유산은 광양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시에서 지정한 제 3호 형제의병장묘역 및 쌍의사와 제9호인 명암 지석묘 군이 있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인물로 고려 말 김황원, 조선조 신재 최산두ㆍ매천 황현 등 우리고장의 특출한 인물들이 이 지역에서 태어났다. 뿐만 아니라 사직단ㆍ서소정ㆍ옥현 요(가마터)등 유물과 유적지가 산재해 있는 곳이다.

서석마을은 황현(1855~1910)의 생가와 본인의 묘가 있고 권역에 선대의 묘가 있다. 매천선생은 조선말기에 출생하여 을사늑약이 체결됨에 선비로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절명 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한 애국지사이다.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운정, 호는 매천이며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할 정도로 총명하여 11세 때 한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29세 때 주위의 권고로 특설 보 과거에 응시하였고 그의 고안(科安)을 본 사관 한창석은 크게 놀라 장원으로 뽑았으나 신분이 몰락한 가문임을 알고 차석으로 떨어뜨렸음을 알았다.

부패한 조정 실상을 간파하고 낙향 후 정사에 참여 할 뜻을 접고 3년 후에 광양에서 구례로 옮겨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1910년 국치를 당해 나라가 망하는 데도 책임질 사람이 없음을 수치로 생각해 술에 아편을 타 먹고 자결하였으니 학자요 선비였던 그가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


각 마을의 유적과 유물

△서석마을은 동석ㆍ명암을 합해 현재 석사리라 한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조선조 세종 때 공씨 성을 가진 분이 처음 입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영모재(永慕齋 황현의 넋을 기리 위한 사당)가 있으며 마을 서편 구릉지에 청동기시대무문토기와 원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 토기가 발견된 곳이다. 또한 마을 앞 구릉지에 지석묘 7기가 동서로 길게 열을 지어 있다.  

△ 동석마을은 서석ㆍ명암과 같은 권역이며 청동기시대 유물인 지석묘가 산포되어 있고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추적해보면 선사시대까지 추적이 가능하다. 전해지는 바로는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경남에서 이주해 살았고, 성주 배씨가 한양에서 내려와 입촌한 후 강릉 유씨가 들어와 마을이 번창했다고 전해지며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유물로는 동석 지석묘 5기가 있는 곳은 돌고개(石峴) 길인데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다 그리고 삼국시대 가마터(窯址)는 옥현마을 서북쪽에 있는데 남해고속도로를 확장하면서 절개되어 단면이 노출되었고 여기서 습득한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문화유산 첨성재(瞻省齋, 박인해의 다섯 아들)이 을해년 7월에 부친을 추모하기 위하여 옥현마을에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소실되고 없다. 

△ 명암마을의 역사는 동석마을과 같은 권역이기 때문에 생성과 역사는 비슷하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개편에는 이 지역에 사직리ㆍ신룡리ㆍ지경리란 마을이 있었는데「조선 면리동 일람」행정구역개편이후 봉강면 석사리에 속한다고 되어 있다.

마을 형성은 임진왜란 백여 년 전 백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울바구 위쪽에 자리 잡았으나 차츰 현재의 마을로 옮겨 사직촌과 명암촌이 합쳐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한림학사를 지낸 김황원(1045~1117년, 광양김씨 시조)의 자는 천민(天民)이고 현재 평양의 8경인 연관정에 그의 시가 게시돼 있다.

유적지로 사직단이 있으나 일제 때 불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울바구 지석묘는 마을에서 약200m 떨어진 들판에 13기가 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영세불망비(명암마을 입구)는 길 한편에 있으며 숙종 44년(1678)에 도임한 강성적 현감을 영송한 내용이 음각돼 있다.

△ 저곡마을은 유서 깊은 곳으로 광양의 인물인 신재 최산두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백운저수지 축조공사로 당시 토점ㆍ작성ㆍ조양을 합해 83호가 수몰되었으며 당저마을 일부도 수몰되었다. 마을의 형성은 김해김씨가 처음 입촌했다고 전해지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이곳은 원래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곳이라 해서 지실이라 했고, 수몰된 토점(土店)은 옹기와 사기를 굽는 곳이라 사구마을로도 불렀다. 앞에 있는 들은 말들이라 하는데 신재 최산선생이 별세하자 전국에서 찾아온 조문객의 말을 매었던 들이라 해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문화유적으로 봉양재(鳳陽齋, 신재 최산두의 묘각)와 그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범 명당(효자 묘로 안만갑의 부친 묘인데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범이 묘 자리를 선정해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 부현마을의 형성은 임진왜란 무렵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입촌하였다고 전해지며 마을 형상이 솥뚜껑 형국이라 해서 부(釜)자를 넣어 부현(釜峴)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으로는 지곡리 지소(紙所)에서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를 저곡에서 재배하여 이곳에 있는 솥에서 삶았다하여 부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유적으로는 남산재(南山齋, 신안주씨 병재의 묘각으로 1976년 건립)와 봉강 배틀 놀이가 있다하니 복원해서 보전하는 일이 시급하다. 

△ 신촌마을은 광양현 북면 며내면 지역이었으며 광양현지도에 며내면 신기리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이름이 나타난다. 마을의 형성은 임진왜란 백여 년 전에 전씨 성을 가진 자가 질마재에 입촌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쌍의사 의병장(강희보ㆍ희열)과 그의 백부 강천상의 아들 3명도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장열하게 순직했다. 이 마을에 사당이 있으며 ‘형제의병장추모회’와 문중 그리고 광양향교가 참여해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