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의 강가에서
내 유년의 강가에서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3 09:16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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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의 기억은 늘 푸른 강가에 서 있다. 동구 밖 집채만큼이나 큰 벗꽃군락을 기분좋게 흔들던 바람,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섬진강, 저녁 노을이 별빛처럼 내리던 들녘, 젖은 풀잎 같은 밥짓는 냄새가 동네 어귀를 돌아 나오면 키재기를 하며 섰던 무적섬도 눈 웃음을 흘리던 곳.

나는 그 곳에서 시인도 되었다가 이야기꾼도 되었다가 그리고 다시 풀꽃 같은 작은 한 아이가 되기도 했다. 어릴 적 기억에서 어느 하나라도 진한 그리움으로 남지 않는 곳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내 가슴 한켠을 늘 지키고 있는 것은 동네 허리를 감싸고 흐르던, 끝 닿는 곳을 알 수 없었던 강이었다.

사람들은 그 강을 섬진강이라 불렀다. 다섯이나 되는 형제들은 늘 그 강에 갔다. 강은 별다른 놀잇감이 없는 시골 아이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강 건너 혼자 흔들리던 나룻배와, 모랫배 강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 치고 있던 잔디 숲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어쩌면 우리를 더 그쪽으로 이끌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미역감는 동생들의 신발 지키는 일을 도맡아 했고 산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강 모래 위에 낙서를 하기도 하고 강 바람 따라 흔들리던 진초록 풀잎들의 노래 소리를 혼자 흥얼거리며 듣곤 하였다. 그렇게 지칠줄 모르는 여름이 강물따라 흐르고 어느새 겨울이 찾아들면 강은 또 다른 모습으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운 널판지 아래 양쪽으로 버팀목을 대고 그 밑에다 철사를 박아서 만든 썰매. 칼날 같은 바람이 미처 여미지 못한 옷 속을 파고 들건만 아이들은 강 이쪽에서 저쪽 까지 달리기를 하며 하루 온종일 한뎃바람을 마셨다. 동생들은 지게를 엎어서 나를 앉게 하고는 줄을 달아 끄는 지게 썰매를 태워주곤 하였는데 꽁꽁 언 강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던 그 감미롭던 기억은 지금도 진한 그리움으로 나를 들뜨게 한다.

하지만 그 강이 늘 한결같은 설레임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하얀 감꽃이 유난히도 곱던 오월 어느 봄이었을까. 할머니를 따라 집 앞 방파제로 저녁 마실을 간 적이 있다. 구부정한 할머니의 치마 끝을 붙잡고 방파제를 걸어 가는데 할머니가 삐기라는 풀잎을 꺽어 속을 열더니 새하얀 솜털 같은 것을 손바닥에 올려 주시며 먹으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어스럼 저녁이 내리는 강가에 풀썩 주저 앉아서 한참이나 그냥 먼 하늘만 바라보고 계셨다. 이름 모를 새들이 빈 허공을 맴돌고 다녔지만 미동도 않으시던 할머니. 심심하다고 치마 꼬리를 잡고 흔드는 나를 한참만에야 돌아 보셨다. 바로 그 때 할머니의 주름진 눈 안 가득 강 같은 눈물이 고인 것을 보았다. 허무한 세월 때문이었는지, 두루 챙겨야 할 집안의 벅찬 대소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서른 남짓 이른 나이에 혼자 두고 떠난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저 건너 너그 할아시가 서 있는갑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다 말고 강 너머를 바라보던 할머니는 몇번이나 이 말씀을 중얼거리셨지만 난 갑자기 강이 무서워져 자꾸만 할머니 치마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어둠이 내린 방파제길을 다시 돌아서 올 때에는 시커먼 강에서 누가 금방 튀어나와 꼭 내 뒤를 쫓아오는 것만 같아 할머니 품에 안겨서 눈도 못뜨고 걸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강 같은 눈물을 보이시던 할머니는 끝내 할아버지를 따라 가셨다. 그리고 강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누우셨다.

지금 그 강에는 건너 마을을 잇는 다리도 생기고 고속도로 휴게소도 생겨서 시끄럽고 요란한 곳이 되었다. 그러나 강을 찾아 미역을 감는 아이도 현저히 줄어든 지금, 이제는 강 같은 마음을 담은 어른의 눈물을 볼 일도 없다. 자꾸만 사려져가는 인심처럼 강도 메말라 가는 걸까? 배를 저어야 건널 수 있었던 그 넓고 커던 내 유년의 강도 이제는 뜀뛰기를 해서 건널 수 있을만치 작고 초라해 졌다.

나는 오늘도 강에 서서 세월을 바라본다. 내 아버지가 그랬고 그 형제가, 그리고 또 그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의 시린 상처를 강에다 쏟아 놓고 산다는 것을 생각한다. 비우지 못해 채워지지 않는 나의 교만한 삶은 늘 그 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고, 어쩌지 못해 그런 거라고 허울좋은 말들로 둘러대 보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강은 말이없다.
강은 그렇게 안으로 안으로만 세월을 삭히고 있는 때문인지...
 
2004년 1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