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전상서
아버님 전상서
  • 한관호
  • 승인 2008.09.11 09:19
  • 호수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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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며칠 후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는 한가위입니다. 이는 햅쌀이 나고 과일도 영글고 하여 먹을 게 제법 넉넉해지는 계절이라 한가위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인가 봅니다.
지난 주 아버님 묘소에 들러 묶은 옷을 벗겨 내고 이발 해 드리듯 말끔히 새 옷으로 단장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고가는 길에 보니 고속도로가 온통 북새통이더군요. 대게가 벌초하러 가는 차량들이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저들도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좀 더 잘 모실 걸 하며 저처럼 후회 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새 저도 쉰을 넘는 나이, 이제야 철이 드는가 봅니다.  
그런데 아버님, 여러 가지로 죄송스런 명절이 될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살가워 하시던 딸네는 이번 한가위는 쉬는 기간이 짧아 설에나 오겠다는 전갈입니다. 막내 녀석도 서울 살이가 팍팍한 지 못 온다고 합니다. 
며칠 전, 아내가 간편하게 차례 상을 주문하면 어떻겠느냐고 하기에 좀 나무랐습니다. 그 사람도 가게를 하느라 시간이 없음을 알기는 하지만 명절과 제삿날 말고는 부모님을 몇 날이나 기억하며 사느냐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명절 상도 주문해서 쓰는 이런 문화가 이미 보편적인 세상이라니 참 얄궂습니다. 물 한 사발 올려도 정성을 담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런 저를 당신의 손주는 고리타분하다 합니다. 아마도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문화도 저희들 세대에서 끝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버님, 아마도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들 중에는 우리 땅에서 나는 먹거리가 아니라 물 건너 온 것도 제법 되지 싶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다 산 사람 먹자고 하는 거고 평소에 먹고 있는 음식인데 뭐 그리 따지냐고들 합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우리네 이웃들이 땀 흘려 지은 농산물을 먹어야 한다는 촌놈 마음입니다. 미국산 소고기가 아무리 싸고 맛나다 한들 내 나라에서 내 이웃들이 기른 고기를 몇 푼 더 주고 사 먹는 게 이 땅에 사는 작은 도리라 생각합니다.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명절을 앞두고 마음을 애잔하게 하는 소식들이 연일 터져 나옵니다. 
연예 활동을 하며 사업을 하던 꽤 알려진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답니다. 사업 실패로 사채 독촉에 시달렸다는 보도입니다. 당사자야 오죽 했으면 그랬으랴 싶지만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안 된 부인을 비롯해 남겨진 이들이 짊어져야 할 고통을 어떻게 하랴 싶습니다.

그런데 더 못 마땅한 건 한 가족사의 비극을 마치 해부하듯이 헤집는 방송과 언론의 보도입니다. 그가 연예인이라서인지 사인을 두고 온갖 추론에다 망연자실해 있는 미망인과 유족의 가슴을 도려내는 보도가 난무합니다. 한 불행한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조차 없는 보도들을 보며 언론인인 저도 부끄럽습니다.  
헌데 더 가슴 아픈 건 부산의 한 원룸에서 혼자 살던 40대 남자가 숨진 지 무려 11개월 만에 발견됐다고 합니다. 이는 아파트 맞은 편 호실 이웃과도 담 쌓고 사는 요즘 세상 풍토에 다름 아닙니다.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되가는 지 종잡기 어렵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요즘 국회에는 선물을 배달하는 택배 직원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답니다. 더구나 주로 피감 기관에서 선물 공세라고 하니 혈세를 판공비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써도 되나 싶습니다. 그런데 경제가 어려우면 노인복지시설, 고아원 등은 그나마 찾던 발길도 잦아들어 여느 해 보다 썰렁 할 겁니다. 하지만 권력이 있는 곳엔 물질이 넘쳐나니 ‘있는 집에 소 든다’는 옛말 딱 그대로입니다. 정치인들을 두고 명절이나 돼야 생색내듯이 어려운 이웃들을 찾는다고 핀잔이지만 그들마저 찾지 않는다면 더 쓸쓸할 이들을 위해 국회에 쌓인 선물들이 나뉘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버님, 태양은 눈이 부셔서 얼굴을 가려야 하지만 보름달은 누구나 쳐다볼 수 있어 좋습니다. 더구나 그 보름달은 어두운 밤, 외진 골목에 환히 빛을 뿌려줍니다. 그처럼 척박한 객지살이에 지친 사람들, 공동화 돼 가는 시골을 지키는 이들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보름달로 뜨는 명절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