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향기] 봄은 온다
[생활의 향기] 봄은 온다
  • 광양뉴스
  • 승인 2020.03.13 16:46
  • 호수 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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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경
시인·소설가
유미경 시인·소설가

저녁에 엄마 집에 가니까 냉장고 속에 블루베리 롤케익이 한통 들어 있었다. 윗집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통 위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한 장 붙여져 있었다.

‘윗집이에요. 아이들 때문에 속상하시죠? 저희가 방학이라서 아이들과 놀러왔어요. 아이들이 너무 뛰어서 아랫집이 너무 시끄러울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아직 며칠 더 있을 것 같은데, 조금만 봐 주세요.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하세요.’

청아한 박하사탕을 입에 넣은 듯한 상쾌함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윗집에서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가 도도도도도 들렸던 것 같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소리는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너무 조용해서 빈 집인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있는 젊은 엄마가 이사를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른 아침과 초저녁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행복했다.

지금 엄마와 아버지만 계시는 집에는, 아침 저녁으로 내가 가서 보살펴 드리고, 3시쯤에 요양보호사가 방문한다.

복도에서 들리는 인기척조차도 반가울 정도로 사람이 그리운 곳에, 도도도도도, 발자국 소리는 청아한 풍경(風磬)이 되어 즐거운 아침을 열어주었다. 삶을 생기 있게 만들었다.

아버지께 아이들이 뛰어서 미안하다고 롤케익을 사왔다면서, 시끄럽냐고 여쭤보았다.

아버지는 작은 소리가 나긴 했지만, 듣기가 좋더라고 하셨다.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오가면서 집에 있어도 24시간이 모자라도록 바쁘게 보내고 있지만, 엄마, 아버지에게는 하루를 견뎌낸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치매로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밥만 먹으면 잠 속으로 빠져 들지만, 치매 초기인 아버지는 정상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텔레비전 속에서 드라마와 낚시하는 모습들이 나오지만, 날마다 보는 그것들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은 뻔하다. 그냥 습관적으로 켜 놓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럴 때 윗집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발자국소리는 당연히 반가울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이웃 간에도 거리두기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은 채 지낸지 오래다. 밖으로 나갈 때도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모자를 눌러쓴 채 걸어 다니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으면 고개를 돌리는 삭막한 풍경이 한 달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나날이 수백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면서 너도나도 불안에 떨며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윗집 아이 엄마의 예쁜 마음은 가슴을 따사로움으로 채우기에 충분했다.

엄마, 아버지가 계시는 빌라는 2층까지 있는데, 옆집에는 총각이 살고, 앞집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부부가 주인이다. 3년 전에 엄마, 아버지가 이사 왔을 때는 아가씨가 위층에서 수학 과외를 했다. 그 아가씨와는 집수리 문제로 두어 번 만난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는 불이 꺼져 있었고, 인기척도 없었다. 나는 아가씨가 이사를 가고, 빈 집이 되어 있는 줄 알았다. 요즘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워낙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18평은 주인이 따로 있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이 많아서, 자주 바뀌고, 어떤 사람이 사는지도 모른다. 특히 나처럼 아침 저녁으로 가서 두세 시간씩 볼일만 보고 돌아오는 경우에는 누가 이사를 가고 오는 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아직 얼굴도 모르는 젊은 엄마가, 아이들이 뛰어서 미안하다고 롤케익을 사 오고, 손수 적은 편지까지 보냈다는 것은 분명 경이로운 일이다.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나는 손수 짠 수세미 6개를 포장하여 이층으로 올라가 문고리에 걸어놓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아이들은 뛰면서 자란다는 메모를 붙여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밝았다. 그 별들이 가슴 속으로 들어와 반짝였다.

아이들은 어릴 때 걷는 것이 아니고 항상 뛰어다닌다. 그것이 자라나는 과정이다. 지금은 성인이 된 아이들이 서너 살 때, 뛴다고 아랫집 아주머니가 올라왔다. 우리 딸에게 엄마가 뛰라고 시켰지? 말해봐, 하고 닦달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아이들도 울었다. 퇴근한 남편에게 아이들이 그 사실을 말했고, 남편은 그럴 수가 있냐고 화를 냈지만, 아이들에게 앞으로는 뛰지 말라고 했다. 그 뒤부터 아이들은 뛰어다니다가도, 갑자기 내 눈치를 보면서 멈칫했다. 그것이 안쓰러워 나는 일층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마음껏 뛰게 하고 싶었다.

개학이 늦어지고 집 밖에 나가는 것도 조심하다보니, 초등학생 셋이 있는 우리 집 위층에서도 발자국소리가 날 때 있다. 마트 가는 것 외에는 종일 집에 있다 보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요즘 나는 거실에 앉아 창밖에 돋아나는 봄 빛깔 보는 것을 즐긴다. 툭, 툭, 송이 째 떨어지는 동백꽃을 볼 때는 온몸을 내던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가, 막 세상 빛 속으로 나온 연둣빛 잎이 빈 가지 위에서 반짝이는 눈빛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럴 때 위층에서 들려오는 도도도도도, 소리는 심장을 뛰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모습을 떠올리게 하면서 나를 20대의 엄마로 데리고 간다. 그 소리는 새싹이 돋아나는 싱그러운 몸짓이 되어, 무료한 일상에 즐거움을 선사하는 멜로디로 피어오른다.

나라 안이 온통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침울하게 변해버린 지금,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나날이 자라나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눈부신 햇살을 안고 달려오는 봄의 전령이다.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새싹들의 꿈틀거림이다. 어두운 장막을 뚫고 강렬한 빛으로 세상을 밝혀주는 붉은 태양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동안은,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꿈꿀 수 있다. 눈부신 봄날이 분명 올 것이라 믿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