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동학운동사적비[1]
[기고] 동학운동사적비[1]
  • 광양뉴스
  • 승인 2020.06.05 16:04
  • 호수 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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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옥룡면 초암마을은 백운의 맑은 기운이 서린 백운산을 진산으로 앞으로는 추산과 동곡 양 계곡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흘러 옥룡천을 이루고 동네 앞 수정보는 초암사람들의 찌든 마음을 씻어주고 멀리로는 옛날 신재(최산두)선생이 어렸을 적 봉강저곡에서 옥룡 서극수 공에게 글 배우러 넘어 다니던 가막재가 눈앞에 펼쳐 보이는 이 마을은 나씨들 집성촌으로 살기 좋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곳 옥룡면 초암길 30에는 나주나씨 보은공파 옥룡초장종중 경모재가 있다. 이재실 담(薔)안에는 동학사적비가 있다. <전면은“東學運動 事蹟碑”후면은 동학농민운동 내용 측면은 라종윤 글, 박기오 쓰다>라 돼있다.

‘이 글을 지은 라종윤 공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지난 1990-1991년에 광양군청 새마을 계장으로 재직시 필자가 모셨던 분으로 휘를 대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이 비는 라광집 공(1843.6-1894.12)의 동학 사적비로 옥룡면 용곡리 1025번지에서 나동한과 창영조씨 사이에서 2남중 첫째로 태어나 백부에게로 양자입적한 분이다.

본 종중 2011.11. 발간한 족보기록에 의하면 <공이 자유로 천성이 豪放하여 初出凡兒터니 及長에 見國事之 日非하고 自己革新터니 甲午년에入於東學이라 家事不如意에陰樂而 自盡하다....동학백주년에 후손일동이 뜻을 모아 추모비를 건립하다.>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사는 친증손 라종섭 옹의 얘기에 의하면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깊이 관여해 조직을 이끌다시피 하다 보니 집안일은 뒷전이시고 전답 팔아 있는 재산 다 끌어다 동학농민 군자금으로 충당 가세는 바닥으로 기울고 집안 형편은 좌초지경이라 했다.

그러다보니 증조모님과 조모님이 힘들게 지내셨다.

외아들인 조부(도익)님 역시 20대 초반에 부친이 동학으로 인하여 돌아가시자 집일은 거들지 않고 매일같이 향교에서 살았다고 한다.

“생활이 힘들자 우리 선친도 갖은 고생하며 지내셨다. 나 역시 4남중 셋째로 태어나 내 나이 6살에 선친이 돌아가셨으니 시골에서 안 해본일 없이 어렵게 살았다”며“이젠 아들 셋을 대학 졸업시켜 여우살이 시켜놓고 살만하니까 5-6년 전에 아내는 하늘나라로 가고 현재는 혼자 집을 지키며 노년을 지내고 있다”

다음은 증조부 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옛날 재당숙모(옥룡면 전 단위농협장을 지낸 라종윤 공의 모친)에게 들었다면서 전하는 얘기다.

[증조부는 키가 크고 장대한 분으로 동학 농민운동 당시 옥룡면 총책을 맡아 활동을 했고 동학이 잘 풀렸으면 현감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와 동학농민 운동이 끌날 무렵(1894,12), 늘 쫓기는 몸이라 활과 칼(검도)을 마음 편하게 숨겨놓을 데가 없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두면 행여 관군이나 왜군에게 들킬지 모르니 자기가 태어난 초가집 생부(生父)댁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리고 밤에 본채가 아닌 아래(사랑)채 용마루 날개 밑에 숨겨두었다가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다시 아무도 모르게 혼자 덩바구골 산속에 묻어 놨다고 했는데 본인이 세상을 버림으로 찾을 수가 없었다.]

또 한 가지는 당시 1894년 기세가 강해졌다가 12월로 접어들어 동학농민군이 열세하다보니 밤낮으로 왜군과 관군들이 집으로 찾아와 광집이를 안 찾아내면 형제를 비롯 이 마을 나씨들을 몰살시키겠다는 등 윽박질렀다.

집안사람들과 동네사람들에게 미안해 가까운 집안 어른의 자수 권유를 받아들였지만, 동헌(군청)으로 가는 도중 준비한 3년 묵은 장(간장)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동헌에 들어가 모진구타와 고문을 당하여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생각해보면 지체 있는 분이라 놈들에게 아첨하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등 들어붙어 손을 비비면 살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도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칼보다 더 강한 지조있는 선비정신으로 이 길을 선택한 것은 천추에 길이 빛나리라 생각된다.

공의 비문에 의하면“나라위해 바친 몸 홍모(鴻毛)같이 여기시고 기꺼이 가담하시어 옥룡면 총사가 되시고 전답 팔아 군자금으로 쓰시고 온갖 희생을 치르며 맹활약 하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관군에 쫓기는 몸이 돼 울분을 참지 못하고 유품만 남겨두신 채 갑오년 12월 17일 사십구세를 일기로 장렬하게 자결하시니 그 비통함을 어디에 비하리요. 무심한 세월은 어언 백년이 흐르고 폭도로 매도하던 동학운동을 이제야 민주혁명으로 부르오니 늦으나마 어른의 큰 뜻 밝은 정신 영원히 기리고 후손들의 뜻을 이 비에 모았나니!”라는 본 비는 동학 100주년(1994.12.17)에 기념비로 세운 비다.

이러한 비는 우리 광양시에서 유일무이한 비로 역사적 가치를 높이는 동학농민혁명의 사적비가 아닌가 싶다. 고로 옥룡면 나주나씨 문중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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