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이유
사람과 삶 -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이유
  • 광양뉴스
  • 승인 2021.02.19 17:20
  • 호수 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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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임
광양YWCA 이사

 

 아버지가 삼대독자였고 별로 여성스럽지 않은 성품의 어머니와 다섯이나 되는 남자 형제들 틈에서 나는 여성다움(?)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차별을 겪었는데 그러면서 어이없이 여성다울 것을 강요당하면서 자랐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 시절에 여자인 내가 격투기 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오빠가 합기도 도장을 했었는데 당시만 해도 여성이나 아동에게 격투기 운동을 시키는 경우가 흔치 않았던 때라 체격이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합기도를 한다는(그것도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다소 특이한 경우로 취급이 됐었다.

그런데 어머니 입장에서 내가 오빠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은 좋지만 나의 행동이나 말투가 조신하지 못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녹음처럼 단골 레퍼토리가 반복 재생된다.

‘여자는 이래야 돼’,‘여자는 저러면 안 돼’,‘여자니까...’,‘넌 무슨 여자애가...’등등 수없이 강요되는‘여자다울 것’의 주문들.

“엄마도 여자면서... 으이그~! 난 엄마처럼은 안살아”라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합리와 불평등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소년기를 지나 다행히 사회와 제도 속의 사람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더불어 사는 세상’에 동참도 하면서 시각을 넓혀갈 수 있었다.

한 때‘여성 상위시대’라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나를 열 받게 하는 말 중 하나) 누가‘여성 상위시대’어쩌고 하면 나는 대뜸“무슨 상위? 밥상 위~책상 위?”라고 반문했다.

“사람이 사람의 위에 있는 사회는 옳지 않아. 네가 말하는 대로 여성이 남성 위에 자리하면 과연 행복할까?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게 여성이 남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상대방은 무안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나는 나름대로 평등한 시각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성 평등 전문 강사 공부를 하면서‘성 평등에 대한 공부는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누구나 꼭 할 필요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라고 생각하고, 사소하게 여기고, 웃어넘겼던 것들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는 것. 예를 들면 교제를 하는 젊은이들 사이의 호칭이나 데이트 비용에 대해 생각해 보자.

데이트 비용이나 무슨 날, 무슨 기념일, 깜짝 이벤트는 누가 준비하는 게 자연스러울까?

“누나는 내 여자니까 너라고 부를게?”그럼“오빠는 내 남자니까 너라고 부를게”라고 하는 건 어떨까?

여성이 나이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교제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반말을 사용 한다던가, 과격하게 벽에 밀어붙이고 키스를 시도한다던가, (사랑하니까?) 성별에 따라 서로 다른 태도, 남자와 여자에게 이중적으로 작용하는 잣대들. 대중문화 속에서 표현되는 남녀의 사소하지만 많은 차이들.

여성의 노출 그림(사진)과 남성의 노출 그림(사진)을 봤을 때 민망한 정도의 차이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지 등. 이런 것들은 지금까지 그저 무심코, 사소하게 취급되었었는데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짚어가며“아~맞아! 그렇지! 그러고 보니 그렇네?” 하고 정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사소하게 여겨지는 기존의 인식들을 기반으로 이 사회라는 구조와 조직문화와 제도가 형성되어 왔고, 폭력의 구조를 심화시켜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심각해진다.

그래서 이따금 누군가 웃자고 하는 말에 나는 죽자고 달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