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광양 패도와 장도
[문화칼럼] 광양 패도와 장도
  • 광양뉴스
  • 승인 2023.07.21 17:42
  • 호수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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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북구
(사)한국농어촌관광학회 부학회장

광양은 패도의 본고장이다. 패도는 사대부와 부녀자들이 생활용과 호신용으로 사용했던 길이 10-20cm 가량의 작은 칼이다. 패도(佩刀)에서 패(佩)는 찰 패, 노리개 패이며, 도(刀)는 칼 도자이므로 허리띠 등에 차고 다니는 칼이다. 주머니(囊) 속에 넣는 칼(刀)이기도 해 낭도(囊刀)라는 이름도 있다.

패도의 기원은 삼국시대 고분에서 빈번하게 출토된 소형의 도검(刀劍), 신라의 금은요대 수식(金銀腰帶垂飾)에 붙은 장도 형태의 장식 등을 통해 매우 오래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여인들의 노리개 장식의 일부가 되었고, 심지어 칼날을 뺄 수 없게 고정된 장도가 제작되기도 하는 등 손칼로서의 실질적 기능보다는 상징성과 장식성이 강조되어 있다. 이름조차도 단장할 장(粧)자와 칼 도(刀)자를 써서 장도(粧刀)로 불리기도 했으며, 은으로 만든 은장도(銀粧刀)는 많이 알려져 있다.

장도는 조선 시대 왕실에서도 수요가 있어 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재화·금·보화 등을 관리하고 공급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인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된 6명의 장인이 왕실용의 장도를 전담 제작하였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민수용(民需用) 장도는 전국에 분포된 사장(私匠)들에 의하여 충당되었다. 근대까지 장도의 산지는 몇 군데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광양지방의 장도가 역사가 깊고 섬세하며 종류 또한 다양하여 한국적 우아함과 장식용으로 뛰어난 공예미를 나타내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粧刀匠)으로 지정되었다.

광양의 장도는 일제 강점기 때 광양 읍내에 있었던 장익선(張益善) 장인의 공방이 전승과 보급로 역할을 했다. 당시 장익선 장인의 공방에서 기술을 배운 사람은 2011년 2월에 장도장 보유자로 지정된 박종군 장인의 아버지인 故 박용기 장인 그리고 강동래 장인, 김중익 장인 등 몇 분이 있었다.

이분들 중 故 박용기 장인은 잘 알려져 있듯이 197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강동래 장인은 경향신문 1965년 1월 13일자 「‘인간문화재’ 상경」이라는 기사에 소개되어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1964년에 광양읍 칠성리에서 서울 구로 2동으로 옮겨 15평의 공장에서 6명의 제자와 함께 장도를 만들었다.

김중익 장인은 경향신문 1979년 11월 17일자 「대를 잇는다 보람에 사는 외길인생 (45) 패도장 김중익씨 아들 성일씨」라는 제목의 기사에 진상면 섬거리에 있는 장인의 3평 남짓한 패도작업장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1986년 10월 15일자 경향신문에는 김중익 장인이 전남도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한겨례 신문 1988년 10월 27일자 기사에는 광양 출신의 장도장인 강용기 장인이 소개돼 있다. 강용기 장인은 1958년부터 김창호 장인으로부터 장도 만들기를 배웠으며, 1966년에 스승이 작고하자 작업 도구를 가지고 상경했으며, 1973년에는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다. 1974년에는 ‘전국관광민예품 경진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나가 ‘은장도’를 출품해 우수상을 받게 되었으며, 혼수품과 외국인 상대로 각광을 받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주문을 받고 있다는 기사 내용이다.

광양 장도는 위의 신문 기사 외에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오일장에서 판매되었고, 패도라 불리며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생활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아직도 당시의 사용 기억을 가진 어르신들이 많이 생존해 계시고, 유물 또한 많다. 철의 도시라고 내 세우려면 이것부터라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관리하여 전승하고, 시민들이 그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