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광양시 다압면 섬진나루터
[2] 광양시 다압면 섬진나루터
  • 광양넷
  • 승인 2007.03.16 17:58
  • 호수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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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매실로 부농된 아름다운 매화마을

매화축제 준비에 여념... 관광객 30만명 다녀 갈 예상

 
광양신문이 우리 지역의 유서 깊은 곳을 찾아 과거와 현재를 탐방합니다. 다시 쓰는 우리마을 성격의 이 기획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호응을 기대하며, 해당 마을의 오래된 사진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편집자 주 
 
  '백운산 동쪽 능선을 옥상으로 삼고 섬진강의 상류를 옥하로 삼은, 즉 경치에 대하여는 두말할 나위없다. 하물며 천하의 삼신산에 방장(方丈)이 그 하나이니 불을 때서 밥을 지어 먹는 사람으로써 이 세상에 살아 이 산의 이름을 들은 자가 또한 드문데 거기서 기거하고 마시고 먹으며 아침 저녁으로 상대하니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는가?

  왼쪽은 영(嶺)이며 오른쪽은 호수라 섬과 산봉우리를 껴 않은 듯 당기는 듯하며 배는 왔다 갔다 하고 구름은 높이 떠 있고 새는 날아 다니고 나루터와 빈 들과 고기떼들이 모여들고... -중략- 송강 정철의 수월정기(水月亭記)중에서

  서인(西人)의 거두 정철은 섬진마을에 있는 수월정에서 그랬다. 정철은 당시 유배를 당해 섬진마을에서 귀향살이를 하면서 수월정에서 섬진나루터 주변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기자는 망덕포구에 이어 매화마을을 탐방하면서 문득 이런 글귀가 떠올랐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

  세월의 흐름속에 그저 덧없는 인간의 명이 한탄스러움을 이르는 옛 구절이 매화마을에 부합되는 말이라는 것을.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손질을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하루가 다르게 격변하는 문명과 더불어 산천도 결코 의구하지만은 않는 까닭이다. 아니 차라리 인간의 명보다 산천의 명이 더 짧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산천의 변화는 흔히 자연의 파괴라는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긴 하지만 때로는 한 선지자의 자연 개발로 인해 순응의 효험을 발휘키도 한다.

  '매화마을'로 일컷는 다압면 섬진마을.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섬진마을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매화마을 이외에도'섬진나루터'와'수월정'이 수 백년전부터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강이 흘러온 수천년동안, 강 사이에 도계(道界)가 생겨난지 백년동안 경남 하동과 한마을처럼 살아오고 있다.

  섬진 마을은 불과 3,40년 전만해도 광양에서 제일 가난한 동네로 여겨져 군수가 부임해 오면 제일 먼저 이마을 솥뚜껑부터 열어 보는게 일과로 여겨졌을 만큼 먹고 살기가 버거운 전형적인 가난한 농촌마을이었다.

  당시 이 마을 사람들의 주 소득원은 땔감이 주를 이뤘다. 주민들은 땔나무를 위해 마을 뒷산의 개나골은 물론 재 너머에 있는 진상의 어치까지 땔감을 하러 다녔다. 나무꾼들은 땔감을 하동으로 팔러가기 위해 땔나무인 장작을 엮어 통나무배를 만든 다음 흐르는 강물에 의지한 채 섬진강을 건넜다.

  당시 하동에는 섬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땔감이 귀해 하동 신기리에 있는 부두로 몰렸다.이곳에는 땔감을 구하려는 송도(율촌공단 앞)와 골약, 태인도, 금호도 사람들은 물론, 부산 자갈치 시장과 하동을 오가는 생필품을 실어 나르는 배가 오갔기에 이들의 땔나무는 생필품과 물물교환이 됐던 장이기 때문이다. 

  이들 나무꾼들은 하동 등지에서 땔나무를 팔고 다압으로 돌아올 때면 이용하는 것이 섬진나루터의 나룻배다. 섬진나루터의 나룻배는 30여 년전 동방여객이 운행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현재 섬진나루터의 나룻배는 30여 년전 그 자취를 감추기 전 마지막 뱃사공이 생존해 있다.

  섬진나루터 뱃사공은 김우열(작고)씨와,김또판(작고)씨, 김봉수(56)씨 3대가 나룻배로 주민들을 실어날랐다.

  섬진나루터 마지막 뱃사공인 김봉수(56)씨는 "나룻배는 한번 강을 건너는데 하동 등을 오가는 지역주민 40여 명이 선승했다"며 "30여 년 전 버스가 운행됐어도 버스비가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어서 나룻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배 삯으로는 보리철에 보리와 가을 추수기에 쌀을 배삯 대신 2번 받았지만 양을 정해놓고 받지는 않아 그저 주민들이 주는대로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렇듯 변변한 농토하나 제대로 개간되지 못했던 이 마을이 중흥기를 맞게된 것은 '밤나무골 김영감'으로 불리던 김오천 옹(88년 작고)한 사람으로 인해 현재 마을 전체가 과거와 달리 부촌이됐다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김오천 옹은 1902년 11월21일(음력)다압면 도사리에서 농부 김용술씨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이 어려워 남의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1818년 머슴살이 품값으로 마련된 여비로 연락선을 타고 일본 구주 복강현에 정착해 광산에서 13년간 광부생활을 해 돈을 모았다.

  김오천 옹은 이후 1931년 그의 나이 30세 때 일본에서 밤나무와 매실나무 각각 5천주를 배에 가득 싣고 고국으로 금의환양 해 고향 인근 야산에 밤나무와 매실나무를 심어 가꾼 것이 오늘에 이르러 마을 중흥의 직접적인 전기가 됐다.

  김오천 옹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아 지난 1965년 정부로부터 산업훈장을 받았으며, 1972년에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 및 지인들과 당시 광양군이 그를 위해 마을 앞에 기념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호를 명명했으니 바로 '율산'이 그 때 붙여진 아호이다. 

  그러나 한평생을 밤나무에 전념했던 율산은 이후 5년 뒤인 지난 88년 향년 87세를 일기로 그 가난에 몸부림쳤던 한 많던 '밤나무골 김영감' 시대를 마감하고, 현재 자신으로 인해 열리고 있는 매화축제를 한번도 접하지 못한 채, 그의 아들인 김달웅(2003년 작고)에게 대물림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정작 이 마을의 밤은 90년대 들어 율촌의 아들인 김달웅은 부인인 홍쌍리씨의 '매실명인' 이라는 언론의 유명세 그늘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지난 해 향년 6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현재 매화마을로 일컬어 지고 있는 섬진마을은 지난 2000년 MBC드라마 허준이 방영된 후 매실의 명성이 급격히 부각돼 그동안 주 소득원이었던 밤은 유명세를 달리하고 있다. 섬진마을은 10월1일 현재 매실은 54ha에 17억5천만원의 소득을 올린 반면, 밤은 140ha에 1억5천만원에 그친 수치상의 대별이 이를 잘 웅변해 주고 있다.

  한편 이곳 섬진마을은 청매실농원을 비롯, 협성농산, 매실영농조합 등 큼직한 전국유통망을 가진 자체 브랜드 회사들이 오늘도 매실을 전국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또한 내년 3월에 있을 제8회 매화축제를 위해 지난 7일 매화축제 준비회를 갖는 등 현재 매화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다.

  지난해 이곳 매화축제를 찾은 인파는 25만명에 이르고 올해도 약 30만 명의 여행객들이 섬진마을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 내년 이른 봄이면 만나게 될 고맙고 아름다운 매화 꽃세상처럼, 매화에서 풍겨나는 맑고 청량한 향기가 긴 불황을 이기는데 청량제가 됐으면 한다.

  섬진마을을 취재하고 이 마을의 오래된 사진을 구하려고 3일을 마을사람들의 앨범을 뒤지다가 청매실농원을 내려오는데 청매실농원을 알리는 안내 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이 글을 이처럼 수정해 마을을 위해 마을 입구에 홍보하면 어떨까.
  '섬진강 끝자락 150리 물길을 이루어 광양만으로 인도하는 백운산자락 이곳,
 
매 년 이맘때 쯤이면 연분홍 꽃구름이 내려앉아 "무릉매화경"에 젖을 수 있는 전국에서 유일한 곳. 온 동산이 매화로 뒤덮여 눈이 부신 이곳. 가난했던 사람들의 눈물과 땀을 먹고 자라나 이제 이들의 땀을 닦아 웃음을 전해줄 매화! 많은 이들의 건강과 웃음을 위해 항상 열려있는 섬진마을에서 멋진 관광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