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에 일군 철강 신화, ‘제철보국’ 안기고 영면
광양에 일군 철강 신화, ‘제철보국’ 안기고 영면
  • 이성훈
  • 승인 2011.12.19 09:53
  • 호수 4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7일 국립현충원 안장…시민ㆍ학생ㆍ각계각층 깊은 애도


지난 13일 타계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7일 국립 현충원에 안장돼 영면에 들어갔다. 금호동 어울림체육관과 광양읍사무소에 차려진 추모 분향소에는 각계각층에서 끝없는 조문이 이어졌다. 특히 금호동에서는 제철 초ㆍ중ㆍ고 학생들과 포스코 임직원, 외주파트너사 등에서 조문객들이 이어지면서 고인을 추모하는 열기는 계속 됐다.

광양에 제철소 건립 설득 끝에 성공 
‘철강왕 신화’ 광양서 완성
김영삼과의 정치적 악연도 ‘화제’

박태준 회장이 별세하면서 광양과 박 회장의 각별한 인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광양명예시민 1호이기도 한 박 회장은 농어촌 지역이었던 광양을 세계적인 철강도시로 만들어낸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광양제철소 부지 확정은 1981년 11월이었는데 광양에 제철소 건립이 추진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8년. 하지만 당시에는 충남 아산으로 제2제철소 부지가 정해진 상태였다.

이후 전두환 정권으로 오면서 박태준 회장은 제2제철소가 전남에 들어서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건의했다고 한다. 박 회장은 당시 5ㆍ18 민주항쟁의 보상 차원에서 제철소를 전남에 들어설 것을 강력히 건의한 끝에 광양에 제철소가 들어서게 됐다는 이야기다.

광양제철소는 81년 11월에 부지 설립이 확정된 후 82년 9월 28일 부지조성공사에 착수했다. 이후 85년 3월 5일 연간 270만톤 조강 생산능력을 갖춘 1기 설비 건설에 착공했으며 87년 5월 7일 준공했다. 92년 10월 광양제철소가 종합 준공하면서 ‘조강 생산 2천만톤’이었던 박 회장의 꿈은 광양에서 현실이 됐다.

광양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악연은 유명한 사건 

1992년 10월 11일 한겨레신문 1면에 보도된 기사. 자료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포항제철 회장을 유지하던 박 회장은 정치에 입문하면서 11, 13, 14대 3선 경력을 쌓았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집권당인 민정당 대표에 오르며 정치 전면에 섰다. 이후 3당 합당이 되면서 박태준 회장은 민자당 최고위원을 역임하게 되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악연으로 최대 시련을 맞았는데 그 장소는 광양이었다.

1992년 10월 11일자 한겨레신문을 살펴보면 광양에서 박태준 최고위원과 김영삼 총재와의 담판이 결렬됐다는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이 사건은 한겨레뿐만 아니라 일간지에서도 대부분 1면에 기사를 실었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당시 한겨레 보도를 살펴보면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은 92년 10월 10일 광양제철소에서 김영삼 총재와 단독회동을 가졌다. 박 최고위원은 김 총재에게 내각제 개헌 대선 공약을 요구했으나 김 총재가 끝내 거부함에 따라 회담은 결렬됐다. 민자당은 대선을 2개월 남겨둔 상태에서 박 최고위원과의 담판이 결렬되자 창당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결국 박 회장은 14대 대선 직전인 1992년 10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이후 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박 회장은 같은 해 3월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고 말았다.
박 회장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4년 간 망명생활을 했으며 97년 5월 포항 보선 출마를 위해 귀국, 같은 해 7월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당시 보궐선거에서 광양에서 버스 3대가 응원차 방문하는 등 박태준 회장에 대한 광양사람들의 사랑은 남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