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4. 옥룡면 2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4. 옥룡면 2
  • 광양뉴스
  • 승인 2013.09.30 09:44
  • 호수 5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산 윤선도가 머물렀던 추동마을, 약수제가 열리는  동동마을

1. 고로쇠 약수축제 사진 = 광양시청

옥룡면 문화유산

△남정마을은 지석묘군의 표본지역으로 한곳에 44기가 있다. 이곳에 집산지가 된 것은 청동기시대의 여건으로 보아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는 좋은 재목과 산채가 풍부한 산이 있고 앞에는 넓고 기름진 평야가 있으며 계곡에서 흘러오는 맑은 물이 넘치니 어찌 풍요롭지 않았겠는가.

또한 유물이 산포되어 있는데, 원삼국시대 것으로 판단되는 토기편이 2곳에서 발견되었으나 조각편이라 형태와 연대를 추정할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 상운마을은 유적과 유물이 풍성한 곳이다. 원래 중흥사는 소실되고 없으며 그 연혁 또한 찾을 수가 없다. 구전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원래이름은 현갑사(玄岬寺)→웅사(熊寺)→중흥사(中興寺)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중흥사는 근래에 있던 사찰을 중창하면서 중흥산에 있는 연유로 중흥사라고 부르고 있으며 개인사찰이다. 경내에 있는 3층 석탑과 석조지상보살반가상을 보면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사찰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심증은 중흥산성에서 승군(僧軍)을 조련시켰으니 왜적은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국보 제103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중흥산성 3층석탑』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오씨 열녀비, 오귀례는 조영래(趙英來)의 처로 남편이 위독하자 단주 수혈하였으나 남편이 죽은 후 시동생마저 죽자 조카 2명을 친자식같이 길러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례 비를 수립한 것이다.

△ 상평마을은 옥룡면의 중심지로 옥룡면사무소, 칠 의사 삼일운동기념비, 전몰호국용사 추모비, 옥룡 치안센터, 우체국, 초등학교, 보건지소, 단위농협, 소방서 출장소 등의 기관이 있으며 송천사지「옥봉당」부도가 면사무소 뒤편에 있으며 칠 의사 삼일운동기념비는 옥룡초등학교 구내에 세워져 있다. 3.1운동당시 서당의 낭자들은 선배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고 참가했다가 잡혀가 6개월의 수감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하평마을은 들 가운데 조성돼 있으며 옥평사(처사서공 암연정유허비, 향선재(享先齋 이천서씨의 재각)가 있다. 안염정유허비는 옥평사 입구에 처사 서천일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비다. 또한 지석묘 군이 마을 3개소에 17기나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2. 옥룡 학사대 : 조선 중종때 유학의 거두인 신재 최산두 선생이소년시절 10년 동안 공부했다는 옥룡 학사대


△ 외산마을, 통진대사쌍비상탑, 동백림문화유산, 맷돌(세운암 골에 있던 맷돌을 가리킴)은 장정 4명이 가동하고 여자 2명이 곡식을 넣고 제분을 만들어 옥룡사에 공급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옥룡사지 일원(통일신라~조선시대의 사찰로 사적 제 407호로 지정)ㆍ운암사지(추동마을 북쪽 골짜기에 있던 사찰로 구전되고 있으나 정확한 곳은 알 수 없다.

864년에 도선국사가 중건했고, 도선국사비가 세워질 무렵인 1150년경 주지이던 지문(志文)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어 사세는 계속 이어졌을 것이고, 문헌에 의하면 16세기 까지 이어왔으나 18세기 들어와 폐사되었으며 이 마을에는 소중한 유산과 유물이 너무 많아 다 열거할 수가 없어 제목만 제시한다.

△ 내천마을은 삼한시대에 내천현성이 있었다는 설이 끓임 없이 이어지고 있으나 기록이나 물증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청나라에서 망명 온 양맥수(풍수지리설과 도술에 능하였음)가 마을 형세를 보고‘마방산하 천인가거지(馬坊山下 千人可居地)라고 했다는 구전이 전해 오고 있으며 여기에 관해 여러 신문에서 몇 번 기사화했기 때문에 생략코자한다.       

△ 동동마을은 깊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으며 약수제단, 학사대, 용문사, 칠성사, 제철수련장, 보건지소 등이 있으며, 학사대는 신재 최산두가 어린 시절 수학했던 자연암굴이며 앞면에「學士臺」라는 글자는 본인이 쓴 것으로 음각돼 있다.

약수제단은 매년 경첩일(3월 6일)에 고로쇠 물로 약수제를 지내는 곳이다. 물방앗간(송천사지 북쪽에 해방직전 한 모씨가 설치, 6.25후 폐업되고, 5.6혁명이 났던 해 광양읍 주 모씨가 설치 운영하다가 1970년경 폐지됨)의 흔적이 있다. 

△ 선동마을은 동곡계곡에 동동마을과 연결되어 있으며 여름휴식처로 좋은 곳이다. 송천사지 및 회은장로비(전남 유형문화재 제 182호)는 병자호란 때 활약한 승장으로 정 2품에 속한 벼슬품위를 받았으며 1677년에 세워졌다.

백운사, 용문사, 상백운암, 성휘선사(임진왜란 때 섬진강의 파수꾼을 맡았던 승장으로 이름을 떨친 승려)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올린 장계에 의하면 구례 석주관과 광양의 두치진의 요새를 지킨 인물이다.    

△ 흥룡마을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조사된 지역으로 기원전 8백 년경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근대에 행정구역개편 이전에 옥룡면 흥룡리라 했고 총독부 부령 제 111호의 행정재편으로 옥동리ㆍ석곡리ㆍ초장리ㆍ장암리ㆍ대방리와 합병하여 용곡리에 속하게 되었다. 문화유적으로 물방앗간과 당산나무가 있으며, 효자 서형흠정려 비가 있다. 그리고 성수단(여름에 따뜻하고 겨울에 시원함)과 용수정(마을 앞에 세워진 정각)이 있다. 

△ 장암마을은 당초에 월애촌ㆍ장암ㆍ진동을 합해 이루어진 마을로 문헌상 광양현 북면 옥룡리 지역이었다.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옥룡면 장암리라 했고 그 후 행정구역개편으로 옥동리ㆍ석곡리ㆍ조창리ㆍ흥룡리ㆍ대방리와 함께 용곡리에 속하게 되었다.

처음 나주 나씨ㆍ전주 이씨ㆍ신안 주씨가 입촌하여 형성된 마을 이라 전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로는 월애 이야기(백운산의 세 가지 정기는 봉황(최산두), 여우(월애), 돼지(?)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봉황과 여우는 태어났으나 돼지(재벌이 될 인물)는 아직 출생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월애는 이 마을 출신으로 고려 충령왕 때 몽고에 처녀공출로 차출되어 몽골 왕의 황후가 되어 권세를 부리고 고려에 도움을 주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관련된 사료를 찾을 수 없으니 설화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 추동마을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명칭이 가라골 또는 가래골이라 불렀던 것에 기인한다. 기록상으로 보면 호수총수(1789년)에 추동산(楸洞山)이라 표기하고 있으나 지방행정구역일람(1912년)에 추동리(秋洞里)라 기록하고 있다.

주요 시설물로는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 추산연습림·보건진료소가 있으며, 양맥수 전설(19세기 초 이 마을에 거주하는 정창하가 중국청나라에서 망명해온 양맥수와 친교를 맺으면서 있었던 이야기다)이 있다.

그리고 고산 윤선도(1587,6.2 2~1671,6,11)는 세 번째 귀양지인 함경북도 산수감산에서 4년 10개월의 유배생활 끝에 마지막 이배(移配)지인 광양현 옥룡면 추동리 504번지에서 2년 2개월(1666년 5월 20일~1668년 7월 21일)간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 해남으로 돌아갔다.

이곳에 있었던 근거는‘孤山 遺稿集’(고산 유고집)에 광양유배시절에 쓴 시 10여수가 있다. 또한 해남 윤씨 종가의 기록에 따르면 몇 년 전까지 추동마을에 있던 윤선도 딸(추동 유배생활을 할 때 아버지를 봉양함)의 무덤을 해남으로 옮긴 사실을 들어 알 수 있다.

△ 율곡마을에는 청동기시대 유물인 지석묘가 확인된바 있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당시의 기록은 없다. 마을연혁을 살펴보면 고려 또는 그 이전에 율촌부곡(평민 촌)이란 특수행정구역이었다.

그 후 행정개편을 할 때 동전리ㆍ재궁리ㆍ덕천리와 병합하여 율천리가 되었다. 마을이 처음 형성된 것은 임진왜란 무렵 순천장씨가 입촌하였다고 전해지며 율천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밤실’이라고 부른다. 문화유적으로는 부락 과수원에 지석묘 12기가 있다.

그리고 당산나무로 귀목나무 11그루와 서어나무 1그루가 있는데 모두 약 420년의 수령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유성재(순천장씨 추모소)와 장씨 달막 공적 비ㆍ효자 장식열 비 등이 있다. 역사성이 다양한 유서 깊은 옥룡면 전체를 담사하지 못함과 중요한 유물ㆍ유적지까지 다 기술하지 못한 채 자료를 정리했으니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