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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근을 아시나요 ?
icon 자주통일
icon 2011-04-15 18:32:33  |  icon 조회: 1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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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가 자주 보는 인터넷 언론사인 오마이 뉴스에서 89년 전대협 대표로 평양을 방문해 화제를 모았던 통일의 꽃 임수경씨가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방조와 승인에 대한 책임을 거론하며 1982년 부산미문화원에 불은 지른 주역중에 한분이면서, 지금은 말기암으로 투병중인 김은숙씨의 쾌유와 치료비 모금 운동을 전개하며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외롭게 해서는 안된다"라는 박원순 변호사의 말을 인용한 글을 보면서 가슴 한편이 먹먹해 온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 고장 광양에서 태어나 식민지 하에서는 민족해방, 해방후에는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온몸을 던져서 노력하시다, 박정희의 5,16이후 쿠데타 세력에의해 사법살인을 당하고도 그 억울한 죽음과 위대한 삶이 고향에서 마저 잊혀진 최백근 선생이 떠올랐다



해방후 치열한 좌우 대립과 한국전쟁 과정에서도 살아 남은 그분이 5,16 쿠데타 이후 그것도 4,19혁명시기 학생과 시민에게 발포한 책임을 진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 내부부 장관 최인규,이승만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 정치 깡패인 임화수와 함께 같은날 서대문 교도소 사형장에서 교수형을 당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같은날 사형 당하신 또 다른 한명인 민족일보 사장이였던 조용수 선생은 민주화 이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형당한 진보당 대통령 후보 였던 조봉암 선생님과 박정희 유신 독재시절 이땅을 공포로 몰아 넣은 사건인 이름도 무시무시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사법살인 당한 많은 분들마저 무죄판결 받고 명예가 회복된 지금 유독 우리 광양출신 최백근 만 그 억울한 죽음이 신원되지 않는 것일까.



1914년 태인동 출생, 1932년 하동 보통학교 재학중 항일 학생운동으로 구속, 고문으로인해 고막 파손, 출소후 광주고보(서중)을 거처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 야간부에 다니며 비밀 독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발각되자 귀국후 비밀결사조직운동을 전개하다1940년 태평양 전쟁으로 징병제도가 강화되자 지리산으로 피신해서 은거하다 해방을 맞이해 잠시 귀향했다 광주와 서울에서 주로 남북협상파와 교류하며 좌우 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남북을 오가며 전개하였으나 분단과 전쟁을 막지 못하고 실의에 빠졌다.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남북을 오가며 남의 이승만 정권과 북의 김일성 정권과는 거리를 둔채 근로인민당이나 중간파 혁신세력과 교류하며 강화 인천 경상도 지역에서 통일 운동을 전개하다 52년 12월 경찰에 체포되어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55년 9월까지 복역하다 만기 출소하였다.



출소후 부산과 서울에서 지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자 다시금 평화통일과 민족자주 운동을 전개하며 혁신동지 총연맹의 공천으로 7월 당시 광양군에서 지금의 국회의원 격인 민의원에 출마 하였으나 낙선하고 서울로 올라가 옛동지들을 규합해 사회당을 창당하고 조직부장, 선전부장등의 요직을 수행하였고, 61년들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민자통)를 결성하여 혁신세력과 자주통일세력의 힘을 집결하여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민족의 역량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하지고 호소하며 서울특별시 위원회 사무국장을 맡는다.



그러나 5,16 쿠데타 발발로 인해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수많은 통일 인사들이 구속되는 가운데 그또한 5월 23일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끝에 그의 동지인 최근우 문희중은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하고 그는 11월 8일 사형이 확정되어 12월 21일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고, 유해는 조계사에 잠시 안치되어 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다.



살아남은 그의 동지들과 현대사 연구학자들은 그의 갑작스런 사형집행은 박정희가 남로당 군사조직의 핵심당원으로 활동한 전력으로 인해 미국이 5,16 쿠데타의 성격과 사상을 의심하자 자신이 얼마나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는지 대내외에 과시하기위해 희생양을 찾다 언론계에서 민족일보 조용수,혁신계에서 최백근을 죽였다고 보고 있다.



그렇게 그는 가고 그와 인연을 맫었던 사람들은 숨죽여 지내야 했다, 공식적인 그의 직계 혈족은 남아있지 않고 그와 활동을 같이 했던 옥곡출신 범민련 남측위 김영옥 고문과 몇몇 동지들 그리고 조카 몇분 가량이 그의 묘소을 찾아 그를 기리고 있는 가운데 또다른 활동 무대였던 북녘땅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도 그의 가묘가 있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악화되어 전쟁불사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잠시 기승을 부리지만 지난 민주정부 10년간 통일과 평화는 먼 훗날의 꿈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로 다가 왔었다.이땅에 다시 봄이 와서 언젠가 우리가 통일을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 하려 한다면, 아무도 말못하고 행동하지 못하던 그 시절 온몸을 바쳐 통일을 말하고 민족의 비원을 위해 실천하다 죽어간 최백근 선생같은 선각자를 반드시 복권시켜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을 그가 태어나고 자란 광양에서 우리들이 먼저 시작 하면 어떨까 하고 감히 제안 한다
2011-04-15 18: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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