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규 자유기고가]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박두규 자유기고가]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 광양뉴스
  • 승인 2012.05.29 09:28
  • 호수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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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읍 쌍백, 본정, 점동, 억만, 익신, 현월, 초남 마을

 

박두규 자유기고가
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조선 초기 광양의 토산품으로 철이 생산되었고, 그 지역은 사곡리로 추정한다. 고려 초기 사어곡부곡(沙於谷部曲)이란 지명에서도 ‘사철(沙鐵)이 나는 고을’로 짐작된다. 조선 후기 광물 생산지를 광물에 따라 금점, 은점, 철점 등으로 불렀는데, 점동 마을은 금이나 철이 생산되던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광양 고을의 광맥은 여러 곳에 분포하지만, 호남정맥의 마지막 지맥인 억불지맥을 마무리한 봉화산이 황금 광맥을 품었다. 봉화산 북쪽의 점동은 1895년 정부에서 사금개발 조례를 발표한 이후 사금 개발지가 되었고, 본정·현월·초남 마을은 1906년부터 광산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광부가 2천 명 정도라는 기록도 있으며, 1958년부터 본정 출신의 하태호가 광양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75년 폐광하기까지 금·은·동을 생산했다.

산업화와 마을의 흥망성쇠
자연마을 쌍두, 백동, 직동을 묶어서 쌍백이라 한다. 쌍두는 산 안쪽으로 굽어진 곳에 있는 대두와 소두를 합한 마을이고, 백동과 직동은 옥녀봉의 옥녀가 베틀머리(機頭)에서 비단을 짤 때 작업실에 해당된다는 곳이다. 옷감을 펼쳐놓은 모양이라는 직동(織洞)은 영세공원 입구 마을이며 건너편 바닥골 쓰레기매립장 입구에 아스콘공장이 광업을 잇고 있다. 본정(本亭)은 가장 먼저 터를 잡았고 맑은 우물이 있어서 본정(本井)이다가 마을 앞 정자 때문에 한자가 바뀌었다.

쓰레기매립장 아래 아스콘공장이 들어선 바닥골

1917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사곡면의 소재지였고 광양광산 사무소도 있었으나 ‘본정갱 사적비’만 남았다. 점동 서쪽 배나무재로 마을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는데 정녕 기운이 골약 황금리로 넘어간 것일까. 점동은 철이 많이 나서 솥을 굽는 쇠점이 있었고 토금을 판 자리를 개간하여 밭으로 삼았다. 봉화산의 봉화를 관리하던 봉수졸이 살던 마을이다. 억만은 마로산성 입구의 정자에서 산성을 오르기 전 장수들이 쉬어가는 어마정(御馬亭)에서 유래하는데 깔밭골 쪽에 큰 변전소가 들어섰다. 굽너리는 ‘말굽이 날아가는 모습(蹄飛-제비)’이란 뜻이었는데, 금을 생산하면서 ‘금이 나는 고장’ 금너리로 변했다.

익신의 자연마을 안몰은 바닷가 가장자리에 위치하여서 가장이고, 고려시대부터 교통·통신·물자 운송 기관인 역이 있었다. 익신역 바깥쪽의 마을은 외동(外洞-바깥몰)이다. 익신 산업단지가 착공하여 공사 차량이 분주하다.현월(懸月)은 봉화산 끝자락 골짜기에 ‘달을 매달아 놓은 곳’처럼 형성된 마을이다. 섬다리를 놓은 고장군의 전설이 있고, 초남 쪽으로 가는 곳의 금광이 광양광산의 시초였다. 초남(草南)은 ‘금이 나는 마을’이란 뜻의‘새냄이’가 한자로 음차되었다. 마을 뒤에는 철도가 났고, 국도 2호선 다리 공사가 한창인데 송전탑이 초남공단 아래로 지나갈 계획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