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규 자유기고가]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박두규 자유기고가]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 광양뉴스
  • 승인 2012.10.22 09:23
  • 호수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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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룡면 은죽 갈곡 재동 덕천 율곡 옥동 석곡 초암 마을

시냇가에서 드높은 정상을 우러른다(옥룡면 은죽 갈곡 재동 덕천 율곡 옥동 석곡 초암 마을)

1천 미터가 넘는 백운산 상봉과 억불봉의 기세를 한 눈에 우러르는 곳. 시냇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점점 큰 물줄기를 이룬다. 시내 동편 골골이 자리한 마을에서 큰 산과 힘찬 물줄기를 바라보며 인물들이 난다. 옥동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나왔고, 율곡 옥동 초장에는 고인돌이 유서 깊은 터전을 알린다. 마을마다 전원주택지며, 초암에 축구선수 기성룡 집이 있다.

시내를 낀 유서가 깊은 마을

은죽은 은하와 죽산을 합했다. 은하는 운하정이라 했으나 마을 옆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은하수와 같다는 이름이고, 죽산은 대나무가 많아 대뫼인데 임진왜란 때 화살대를 만들었다 한다. 갈곡은 취실이라 불리며 칡이 많이 나는 곳 또는 산이 갈라진 곳이다.

재동은 재궁과 동전으로 나뉜다. 재궁은 순천 박씨 재실에서 유래하고, 동전은 목동(牧童)이라 했는데 밭의 동쪽에 있다고 동전으로 바꿨다. 광양읍 죽림리로 가는 목딩이재가 포장도로가 되었는데 그곳 주변에 택지를 다듬고 있다. 덕천은 국사봉에서 내려오는 시내를 끼고 있어 덕내라 했다. 율곡은 산마을이 변화되어 밤실인데 한자로 그렇게 썼다.

옥동은 안터로 내기(內基)라 기록되었으나 조선시대 금이 채굴되어 옥동(玉洞)으로 바뀌었다. 비석거리는 고려말 조선초 문신 이무방의 선산이며 광양 이씨의 본관이 되는 터다.

석곡은 돌로 집을 지은 석실(石室)이었다는데 석실(席室)로 봐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초암은 초장과 장암으로 구분된다. 초장은 풀이 많이 나고 마을 역사가 가장 오래되어 본똠이다.

장암은 풀과 바위가 많다는 뜻이다. 월하촌은 월애 고향으로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공녀로 가서 황제의 총애를 받아 고국에 공헌했다고 전하며 백운산의 여우 정기가 드러났다고 한다.

개성 있는 세계를 일군 사람들

재동 허만윤(65) 씨는 원예업을 하면서 과수원 하려고 저수지 위에 구입한 땅에 집을 마련하여 귀향했다. 주말농장을 염두에 두고 감귤 하우스까지 하는 다품종 농장이라 쉴 틈이 없는데, 귀농 희망자는 충분한 교육과 자기 체험이 있어야한다고 이른다.

율곡 장한종(90) 씨는 일제강점기 광양 광산에 일하다가 제주도로 징용되어 3개월 동안 해안 땅굴을 팠다. 6.25 때는 공무원이어서 밤에 피신했는데 산 사람들의 위협사격에 오른쪽 발등에 관통상을 입었고, 52년부터 행적을 날마다 정리했고 특히 날씨는 농사에 필요하여 자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석곡 홍은옥(70) 씨는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한문과 서예를 시작하여 붓을 놓지 않았는데 76년 박건보 서예전을 보고 각오를 다져 주경야독의 자세로 글씨를 썼다. 93년 광양서우회 창립 회장을 맡았고 해마다 전시회 하며 보람을 느낀다.

초암 나계진(68) 씨는 우체국에서 명예퇴직하고 벼농사와 감나무를 가꾸는데, 나주 나씨 사적비 중에서도 유복자 할아버지를 키워낸 할머니의 효열 정신이 자랑스럽다.

나상채(53) 씨는 옥룡을 농업지역으로만 지정한 도시계획을 변경하여 일부 지역을 전원주택지로 수립하기를 바란다.

초암 조홍헌(70) 씨는 30년 동안 모은 민속자료를 보관하며 ‘쉬어가는 박물관’을 운영하다 10월 들어 폐업했다. 광양시에서 원하면 기부체납의 뜻을 밝혔지만 민속관 추진이 안 되어 자료 관리에 한계를 느끼고 몇몇 자료는 다른 곳에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