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박두규 자유기고가
[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박두규 자유기고가
  • 광양뉴스
  • 승인 2012.11.19 09:45
  • 호수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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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이 공단으로 바뀌어 달라지는데

장동 쌍효려비, 유계양과 부인 오씨 효행을 기리는 정려
옥곡면 금촌 신금 의암 매동 곡동 마을

억불지맥의 동쪽 끝점인 가야산과 금촌 삼발등 사이의 갯가를 마주하여 형성된 마을들. 월앙골 앞의 궁답방천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논을 만든 곳이며, 62년 옥곡천과 수어천 하류 갯벌을 막아 옥진평이 됐다.

광양제철이 들어온 이후 관련 공장이 의암과 신금 앞에 들어섰고, 12년 8월 황금들판의 대부분을 신금일반산단으로 준공하여 공장 입주를 기다린다.

갯가를 바라보며 형성된 마을
금촌은 일찍이 금련촌에 속했고, 마을 앞 갯가에 둑을 쌓아 염전을 만든데 이어 고속도로까지 가로지른다. 신금은 신라시대 옥곡소가 있었던 곳이며 섬거포로 오가는 나룻배가 생겨 신나루(新津)였다.

신진은 안신어리(內新)와 바신어리(外新)으로 구분된 나루가 있었다. 의암은 옷바구 또는 옷바우인데 마을 앞의 바위가 치마 입은 것 같았고, 암행어사 박문수가 쉬어가는 바위에 ‘의암(衣岩)’이란 글자를 새겨놓았다. 웃옷바구(上衣, 안떰) 중심이고 아래옷바구(下衣, 바깥떰)와 월앙골의 자연 마을을 포함한다.

매동은 원래 장자(부자)가 산다는 장동인데, 48년 마을 주민들이 매화가 많다고 매동이라고 결의했다. 가야산골은 광영동 중마동 골약동 간의 경계에 위치하고, 놋정골에는 놋점이 있었다.

곡동은 골떰이며 옛날 옥곡장터가 있던 장기리를 포함하고, 조선 고종의 정려를 받은 쌍효려비가 정신문화를 지킨다. 임천(林泉)은 가장골이었고 숲이 좋다는 뜻이다.

변화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신금 서청유(70) 씨는 마을 앞의 공장에 주민이 일용직으로라도 참여하면서 공동체를 이루기 원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농촌문제가 부각되지 않아 섭섭한데 식량자급을 위해 직불금 확대, 농민연금 신설, 농업재해 보상의 재난지수 낮추기 등의 정책을 바란다.

의암 정형기(84) 씨는 6.25 사변 나던 해에 경북경찰국 근무를 했는데,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이 경북지사 관사에 와 있다가 떠나버린 다음 날 포탄이 날아오던 것을 기억한다. 61년부터 도정공장을 차리고 옥진평 벼를 찧었는데 공단이 들어서면서 문을 닫았지만 피해 보상의 길이 없다.

매동 이민재(60) 씨는 농협에서 정년을 하고 수평동 매냄이에 매실을 재배하면서 과수 재배도 도로, 전기, 물이 통해야 함을 실증한다.

곡동 백일홍(75) 씨는 10대의 나이에 여순사건을 경험했는데 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서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불합격을 맛보았다. 제재소를 운영하여 기반을 잡았으나 정치와 사업을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삶을 보내고, 지금은 어린이집 두 곳에서 1주일에 2시간씩 한자를 가르치는 보람을 가진다.

유재식(63) 씨는 수익 없는 벼농사와 함께 30년 넘게 시설하우스를 하는데 지금을 애호박을 생산한다. 유산 없이 부부가 노력하여 농토를 구입했고 신금공단에 들어간 3마지기 보상비를 받아 진상에 11마지기 논을 마련했다.

박성주(59) 씨는 옥곡영농조합법인의 총무로 ‘오감이 통한 쌀’ 도정공장 운영의 책임도 맡았다. 07년부터 무농약 인증 벼를 재배하여 학교 급식으로 쌀을 납품하는데 생산량이 작아서 연중 판매가 안 되어 안타깝다.

송정옥(59) 씨는 공옥진 여사를 존경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마다 흥을 돋우고 싶어 전국 노래자랑에도 나가고 여러 행사에서 각설이 타령을 했다. 갱조개와 게를 잡아 조리하던 추억을 정리하고 싶으며 한식조리사 자격증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