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7. 광양읍 역사와 문화 ②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7. 광양읍 역사와 문화 ②
  • 광양뉴스
  • 승인 2013.10.21 09:34
  • 호수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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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ㆍ광산으로 유명한 초남마을 전래 향가 전해지는 본정마을

광양읍 서천변 분수대

각 마을 문화와 특성
                                   

문화탐방의 길을 떠나면서 우리 문화재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를 가름 할 수 없어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잊어지고 사라져 가고 있는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각 마을을 답방하면서 문헌을 참고해 그 지역의 특성은 물론 문화유적과 유물을 찾아 사라지고 손실되어가고 있는 문화유산을 찾는 길이다. 지역은 읍내리ㆍ인서리ㆍ인동리ㆍ칠성리ㆍ목성리 등을 제외하고 소외되기 쉬운 주변마을로 먼저 답방했음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 초남마을에는 세모재(진양 정씨 공대공파 묘각), 석종재(밀양 손씨 재각), 전주 이씨 효열비가 있으며 글씬 바위(글씨를 써놓은 바구라는 뜻)에『광양광산으로 유명해 질것이며 대궐도 들어설 것』이란 내용의 글이 있었으나 오래전 장마에 돌이 굴러 깨져 사라져 버렸다.

굴 할매, 이 마을은 옛 부터 어업이 전업이라 특이성이 있으며 한 해 동안의 어로(漁撈)가 무사하기를 바라며 섣달그믐날 어성과 굴 할매에게 제를 올렸다. 또한 고을 전래 향가로 봉화산 등에지고 돋아난 추남/ 명산 백운산의 명수(明水)도 앞으로 흐르네/ 물줄기 따라 남쪽으로 향한 어부의 배 언제 돌아오나/ 뱃머리 기자리는 가심 푸른 부녀들 이라는 노래가 전한다.

 

광양읍 마로산성 유적지 현장



△ 현월마을에는 고장군 설화가 전해오는데, 관직상의 장군인지 힘이 센 장군인지 모르나 초남다리가 없었던 시절 그가 섬돌다리를 놓아 편의를 제공했다고 전한다. 초남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895년 경 정부에서 사금개발 조례를 발표한 후 1906년에 함안 사람 김순서와 김순여가 사곡리와 초남리 일대에서 광맥을 발견하고 채굴한 것이 광산의 시초였다.

그 후 일본인에 의해 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돼 광양하면 금(金)을 연상할 만큼 막대한 금이 생산되었다. 그 후 일시 폐광도 있으나 1958년 정부로부터 폐광지를 불하받아 채광을 실시하여 국내 최초의 은식제련장을 마련하여 국내 굴지의 광산이 되었으나 1975년 폐광이 되었다. 마을 앞 모래 갯벌에 재첩이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1970년까지 이곳에서 광양읍ㆍ봉강ㆍ옥룡사람들이 채취해 춘궁기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 기두·용두마을은 같은 지역이고 동일한 생활권이다. 1999년 용강리 택지개발 때 일부 문화재가 발견돼 학술적으로 발굴조사 한 결과 대규모 취락지 임이 확인되었고 발굴된 유물과 유적지로보아 통일신라 이전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록상으로 보면 17세기에 동면 사곡리에 속하였고 1872년 광양현 지도에는 사곡면 기두리로 표기돼 있으며 1917년「조선 면 리 동 일람」에 광양군 용강리(기두ㆍ용두)에 속해있었다. 이 지역의 뒤 산이 마로산성이며 기두유적지ㆍ기두지석묘군ㆍ와룡고분ㆍ관동유적지(석관묘 30기, 주거지 6기)ㆍ와룡재(신안주씨 주용득 묘각)ㆍ효열부유인 김해김씨 기적비 등의 유적지가 산재해 있는 지역이다.   

△ 내우마을 문화유적으로 여제단은 마을 입구에 있으며 옛날 자연숭배 일원으로 일ㆍ월ㆍ성ㆍ신ㆍ산천에 신이 있는 것으로 믿어 제단을 만들었으며 양편에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 장승을 세웠고 제단에는 재액을 막는 표적인 솔대를 세워 액과 질병의 침입을 막고자  정월 대보름에 동민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

광양궁시



△ 월파마을 문화유산은 서신구(1633~?)가 낚시하던 곳으로 자신의 호를 따라 월파라 하였다. 현재 비대만 남아있다. 1970년 월파에 세워졌던 비문에 의하면 본관은 이천이고 원숙공(元肅公) 눌(訥)의 후손이며 암연처사 서천일의 고손이다. 이곳에 유배 온 고산 윤선도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향교 중건에 관여했다는 공적기록이 남아있다. 

△ 본정마을에는 문화유산으로 마을 전래 향가가 있는데 ‘시집살이’가사는 (백두산이 높다 해도 올라서면 발밑이요/ 두만강이 지프다 해도 배를 타면 배 밑이요/ 우리낭군 어머님은 살아갈수록 깊어지네/ 앞밭에는 고추심거 뒷밭에는 난초심거 고난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매울까/ 시아부지 호롱새요 시어머니 궂은 새요 시동 새는 나팔이요 시누 애씨 삐쭉 새요/ 우리님은 미운 새요 자식하나 우는 새요 며느라기 가는 질은 억만 고개 부고개요/ 열한 방에 자리 펴기 아홉 솥에 불 넣기요 십리질에 물질러서 오리 길에 방애 찧기/요내 홀로 타는 간장 어느 누가 알아줄까) 이다.

‘옥단추’(큰 올캐)는 ‘아ㆍ금단추(작은 올캐)아/옥단 춘아 세실금단 남대 춘아/ 일씨 금단 내 집인들 세간 보고 내가 왔나/자그마한 초립동이 누구오랍씨 보고 왔지/월등산의 전답은 돈주면 물려준다/참새 같은 요내 몸은 돈준다고 물려내냐/ 춘아춘아 옥잔춘아 성님방에 오지말자’이다.

‘사랑가’는 ‘뒷동산천 외도토리는 벌기 묵을 가 수심이고/삼대독자 외아들은 배고플까 염려되고 병이들까 수심이오/ 영감사랑 땅에 주고 아들사랑 며느리 주고/딸 사랑은 사위주고 끝 사랑은 소자로다’이다.  

△도청마을 문화유적으로 도청염전이 있었고 현재의 제방이 축조되기 전까지는 마을 앞 개펄에 고려시대부터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은 전주 이남까지 공급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오염(煎熬?)이라 불렀던 이 토염(바닷물을 철판에 모아서 불을 지펴 만든 소금)은 천일염(바닷물을 일정한 장소에 가두어 햇볕으로 증발시켜 만든 소금)이 생산되기 전까지는 한때 140여명의 업자가 있을 정도로 생산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농경지가 되었으며 마을 앞 하천에‘딴섬’이라는 염전 터가 남아있었으나 약 30년 전에 큰비로 유실되었다. 도청동제와 도청 줄다리기가 있었으며 이때 인근부락인 익신ㆍ용강ㆍ초남주민들 까지 참가하기도 했다.

광양장도


△ 회암ㆍ예구마을, 이곳에 청동기시대 유물인 지석묘(15기)와 조개무지ㆍ돌도끼ㆍ화살촉ㆍ돌화병 등이 출토 되었으며,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예구는 고려 때부터 있던 옹기막으로 1982년 까지 광양고을에 유일하게 옹기제작의 기능을 유지해 왔으나 산업의 발달로 쇠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효자 김치조 장려(김치조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65년 조정의 명을 받아 건립)가 있으며 철길을 따라 순천 경계까지 답사치 못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 교촌마을은 원래 우장면(牛藏面)에 속했던 것이며 우장리이서 교촌리 등으로 명칭이 변화되었고 소(牛)가 새끼를 품고 있는 형국이라 명명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마을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호구총수(1789년)에 우장면 교촌이라 기록돼 있다.

마을에는 문화재로 광양향교ㆍ봉양사 및 사적비ㆍ홍악재터ㆍ5의사비ㆍ황매천 추모비ㆍ의사 황병학 추념비ㆍ하마비ㆍ홍살문ㆍ신재 최산두 유허비ㆍ덕석기와 중요시설물로는 광양교육청ㆍ유림정 등이 있는 문화재의 산실이다. 특히 상여를 멜 때 부르는‘오채소리’가 전해오고 있으며 덕석기를 앞세운 농악은 매우 특이한 점이 있었다.

농악은 두 가지 특징이 있으며 하나는 북 놀이고 다른 하나는 김매기 농악인데 김매기가 끝나면 많은 농군이 농악대로 변하여 부락상호간 접전이 벌어진다. 때문에 이 마을 농악은 광양을 대표하는 농악대였으나 지금은 그 맥을 이어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 마을의 자랑으로 보존하고 있는 용기(龍旗)인 덕석기는 권농기(勸農旗)로서 영조 40년(1764) 당시 현감 윤밀(尹謐)의 지휘감독으로 제작되었으며 규모는 가로 3m, 세로 1.8m 이고 재료는 중국산 당목으로 4m둘레를 30cm 3각형의 검은 천으로 둘러져 있다고 전해진다.

확인해보니 기의 흰 바탕에는 연한 하늘색 구름이 깔려있고 구름위에는 황룡과 청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이 5색으로 그려져 있다. 이 기(旗)에는『光陽郡 光陽面 牛山里 勸農旗, 甲子 七月 日 如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이는 1924년(甲子)에 제작된 것이 확실하다. 89년이란 세월이 흐르도록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니 문화재적가치가 있어 보인다.

마을에서 하나 더 만들었으나 품격이 떨어지고 탈색 등의 변화가 있어 사용치 않고 있다고 이장 이동열씨가 전해준다. 시지에 광양읍을 법정리 15개와 행정리 54개로 세분했기 때문에 읍내 중심지를 제외하고 이번 채록은 읍 지역은 이로써 마무리코자 하니 참고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