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김치
토굴김치
  • 귀여운짱구
  • 승인 2008.04.09 22:41
  • 호수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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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으로 이사오기 전부터 집 뒤에 토굴을 파고 김치독을 묻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토굴 속에 김치를 담는 것이 다소 낭만적이며  아주 쉽고 단순한 일이라 생각했다.
귀농하면서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작업이 김치를 담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땅을 파고 H빔을 묻고 독을 묻으면 어렵지 않게 토굴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대형 포크레인을 불러 땅을 파는 작업을 시작했지만 수시로 나타나는 큰 바위들 때문에 토굴 만드는 작업은 수시로 중단되었고 장비도 고장이 나기 일쑤였다.
꼬박 사흘간에 걸친 작업끝에 토굴의 형태를 갖춘 저장고가 탄생되었다. 그런 다음 땅 속을 다시 파고 김치를 담을 큰 항아리 8개를 토굴 속에 묻었다. 이제 마을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아 김치만 담으면 저 속에 넣어 2년 동안 숙성시키면 아주 맛있는 묵은지가 탄생할 것이리라. 그러한 기대감은 농촌생활을 준비하는 내겐 아주 즐거움을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며칠 후 비가 온 뒤 토굴을 살펴보니 땅 속에 조용히 묻혀 있어야 할 항아리들이 시위하듯 모두 물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니, 우째 이런 일이…하도 놀라서 발을 동동구르며 자세히 살펴보니 토굴을 만들면서 배수작업을 하지않았던 탓이었다. 비가 오면 산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고스란히 토굴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토굴 속은 물바다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마을 사람들이 달려오고 양수기로 물을 퍼내고 다시 토굴을 덮었던 흙을 모두 걷어내고 기초부터 다시 만들고…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일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며칠 후 마을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김치 담그는 일은 마치 작은 잔치처럼 시작되었다. 우리가 살 집 앞마당 한켠에는 김치를 담으러 온 사람들과 길가다 궁금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였었다. 앞마당에 모인 아주머니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익숙한 솜씨로 김치를 담았고 주방에서는 돼지 고기를 삶고  갓담은 배추 속을 곁들인 훌륭한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시간엔 막걸리도 준비되어 그날은 마을사람들의 흥겨운 김치담그기 잔치가 벌어졌다.

그렇게 담은 김치가 토굴 속에서 이 년여의 긴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오늘 땅 위로 올라오는 날이었다. 과연 토굴 속에서 잘 익어가고있을까? 혹시 상하거나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 하는 걱정과 기대가 항상 머릿속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토굴 바닥의 흙을 걷어내고 덮고있던 지푸라기도 걷어낸 다음 뚜껑을 열었다. 바깥 날씨는 더위가 느껴질만큼 따뜻한데도 토굴 속은 아직 한기가 느껴졌다. 숨을 쉬거나 말을 하면 하얀 입김이 묻어나왔다.
땅 속에서는 항상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장시간 김치 저장이 가능한 것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어보았는데 아뿔싸 김치 독에서 나는 냄새가 고약스러웠다. 찬찬히 살펴보니 큰 독 안으로 물이 들어갔는지 심하게 부패되어있었다.

숨쉬는 항아리의 효능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 김치를 비닐에 싸지 않고 항아리 속에 그대로 넣었더니 항아리 틈새로 스며든 물이 김치에 섞이면서 부패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옆에 묻어놓은 김치독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주저앉아 큰 한 숨을 내쉬며 참 시골생활이 어렵구나 하며 절망하고 있었다. 힘들게 준비한 것인데 이렇게 버려야 한다니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여긴 괜찮은 것 같은데…" 맥빠진 가운데에서 들려오는 집사람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그나마 큰 위안처럼 들려왔다.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다행이 다른 독들은 큰 문제없이 숙성이 잘 되어있었다. 천만다행으로 건져낸 묵은지를 안전한 저온창고로 옮길 수 있었다. 거의 반 정도는 부패된 김치를 보며 속상하기도 했지만 시골생활의 준비를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해 비싼 수업료를 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익힌 묵은지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백운산 물이 좋아서인지 마을 사람들의 솜씨가 좋은건지 묵은지 맛은 대단했다. 이 지역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칭찬하는 맛이 바로 김치의 맛이다. 깊은 백운산에서 자라는 채소와 풍부한 수량, 사람들의 정성이 곁들여져 훌륭한 김치라는 작품이 탄생했다. 앞으로도 우리가 사는 이곳은 김치가 큰 소득사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는 자연환경이 맑고 깨끗하면 그 곳에서 생산되는 자연산물도 맛있고 훌륭한 상품이 된다는 것을 느낀 하루였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배운 토굴김치를 보면서  앞으로는 더욱 맛있는 김치를 담아보리라는 다짐도 해본다. 하조마을 어느집에서든 들러서 김치맛을 한 번 보시라. 다른 지역에서 쉽게 맛 볼 수 없는 훌륭한 김치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