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칼럼] 연식고초(鳶食枯草): 솔개가 마른 풀만 먹다
[고전칼럼] 연식고초(鳶食枯草): 솔개가 마른 풀만 먹다
  • 광양뉴스
  • 승인 2023.12.01 18:45
  • 호수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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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일 연관단지 대한시멘트 1공장<br>
이경일 연관단지 대한시멘트 1공장

우리나라 구전 설화로 내려오는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신임을 얻어서 나중에는 큰 해를 입히는 사기꾼 이야기로 중국 고사가 아닌 우리나라 이야기다.

옛날 전라도 어느 고을에 이름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근처에서 제일 부자라서 오가는 길손들이 자주 찾아들었고, 서운치 않게 접대하여 재우며 그런대로 인심도 얻었다. 그런데도 후한 주인의 인심과는 달리 찾아오는 사람마다 언제나 주인에게 이익되는 일은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혔다. 주인은 사람들이 다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며 웃어넘기려 했으나, 찾아오는 사람마다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자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떠한 과객도 이제부터는 재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후 2년여가 지났을 무렵 해가 넘어가는데 이 부잣집에 행색이 남루한 선비풍의 과객이 찾아와 하루저녁 신세지기를 청한다. 주인이 사정이 있다면서 거절하자, 과객이 말하길 황혼축객(黃昏逐客:저녁 무렵 손님을 쫓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면서 사정했다. 인정과 예의에 얽매인 주인은 어쩔 수 없이 하룻밤 재워 주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일찍 과객은 먼 길을 가야 한다며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 뒤 두세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떠났던 과객이 다시 돌아왔다. “어두운 새벽에 급하게 떠나느라 주인장의 새 버선과 바뀐 줄도 모르고 신었습니다. 10리쯤 가다가 날이 새서 보니 버선이 바뀐 것을 알았습니다. 하룻밤 신세진 것도 미안한데 버선까지 바뀌었으니 그냥 갈 수 없어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수많은 과객을 보았지만 이처럼 정직하고 작은 것에 예의 바른 과객은 처음 보았다. 하찮은 버선 한 짝 때문에 10여리나 가다가 돌아온 것이 참 고마웠다. 

주인은 과객을 붙들고 꼭 돌아가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보수는 후하게 줄 테니 집안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과객은 못이기는 체 그 집에 주저앉았다. 과객은 온 정성을 다해서 그 집일을 내 일같이 도왔다. 주인 역시 과객을 신임하여 전곡(錢穀:돈과 곡식)의 출납을 맡겼으며, 한 푼의 부정이 없어 주인은 신경 쓸 일도 없고 재산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이러구러 몇 년이 지났을 때 주인은 내 일처럼 정성을 다해 일하는 과객에게 수 만 냥을 내어주며 남원고을에 가서 논 백석지기를 사라고 명했다. 과객은 돈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 그런데 열흘이면 왕복할 거리인데 한 달이 지나도 과객은 돌아오지 않았다.

주인은 사람을 남원으로 보내 과객을 찾았으나 전혀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과객이 쓰던 방을 뒤져보니 소지품은 하나도 없고 빈 책상 서랍에 ‘연식고초(鳶食枯草)’라고 쓴 쪽지 한 장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주인이 아무리 보아도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근처에 서당 훈장에게 전후 이야기를 하고 보였더니 과객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식고초를 풀이했다. 

초여름에 밀밭에서 꿩이 새끼를 치려고 알을 품고 있었다. 꿩은 새끼가 알에서 깨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그때 솔개 한 마리가 꿩 앞에 앉아 꿩에게 수고 한다며 마른 풀을 쪼아 먹는다. 꿩은 솔개가 알을 해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태연하게 왜 마른 풀을 먹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솔개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린 항상 남의 고기를 먹어야 살지만 나는 차마 남을 해칠 수가 없고, 풀도 푸른 것은 생명이 있으므로 그 또한 먹을 수가 없어 이미 죽은 마른 풀만 먹고 삽니다.” 꿩은 어느 정도 경계심을 풀기는 했으나 그래도 계속 솔개를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꿩은 배도 고프고 볼일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냥 자리를 떠날 수 없어 고민하는데 솔개가 말했다. “마른 풀이나 먹는 내가 사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알을 잘 돌봐 줄 테니 안심하시고 다녀오시게.” 꿩은 그 말에 솔깃하여 배가 고픈 나머지 솔개에게 알을 맡기고 자리를 떴다. 급한 대로 이것저것 주워 먹고 볼일을 본 후 자리로 돌아 와보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솔개는 보이지 않고 알은 모두 깨져 빈껍데기만 남아 있었다.’는 훈장의 설명이다.

여기에서 연식고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는 간단하게 평가하지 말고 일단 경계해 보다가 나중에 믿으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자기에게 조금 잘해준다고 모든 것을 맡기는 주인장이 어리석어 사기를 당한 것이다. 처음에 보냈던 과객들도 그 부자를 사기 치려고 미리 미끼로 보냈던 것이다.

새들의 왕이라 일컫는 솔개가 왜 영양가도 없는 마른 풀을 먹을까. 평상시 하는 행동이 아닌 이상한 행동을 하면 경계해야 할 것이며 환심을 사기 위해 고초(枯草)를 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근본을 무시할 수 없듯이 평판도 가볍게 봐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