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시절을 함께 한 남편의 평생 동지 ‘김대중’
고난의 시절을 함께 한 남편의 평생 동지 ‘김대중’
  • 최인철
  • 승인 2009.08.27 09:41
  • 호수 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부터 동지이자 친구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알고 지낸다는 사실만으로 중정(중앙정보부 현 국정원)과 경찰의 감시가 심한 시절이었어요.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낙이 시장을 갈 때도 미행을 할 정도였으니 바깥양반은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김 전 대통령과 남편은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한다는 생각에 그 마저도 힘든 줄 몰라 했어요”

국장을 치룬 지 하루 만에 만난 천영심(80)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보낸 지난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18일 경로당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그는 많이 울었다. 김 전 대통령이 입관할 때는 옛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요. 평생을 남편과 동지로 지낸 사람인데 얼마나 놀라고 슬픈지. 마지막 입관 때까지 많이 울었소. 하도 고생이 많았던 삶을 산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많이 안쓰러웠다.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는 그의 모습은 고난을 겪던 김 전 대통령의 모습과 겹쳐져 너무 짠했다.

그가 생각하는 김 전 대통령은 손이 참 보드라운 사람이다. 또 정이 많은 사람이다. 첫사랑이었던 차용애 여사를 먼저 보내고 평생 잊지 못했던 사람이다. 자신의 정치입문으로 진 빚 때문에 먼저 갔다는 생각에 목포에 내려가면 항상 차 여사의 묘소를 찾았던 사람이다. 무엇보다 김 전 대통령은 누구라 칭하기보다 동지라는 말을 많이 썼던 이다. 항상 동지라는 연대감을 강조했다. 기억력이 남달랐고 항상 양심을 이야기 했다.

손이 참 부드러웠던 사람

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던 시절 여사의 남편 고 김경의(김종대 시민포럼대표 선친) 옹은 2년 동안 당국의 마수를 피해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남편은 김 전 대통령과 평생 동지였고, 당시는 김대중이라는 사람과 친분이 있던 모든 이들이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감당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다행이 남편은 ‘김대중 선생이 내란음모죄로 잡혔으니 빨리 피하라’는 한 지인의 연락을 받고 몸을 숨겨 사법살인의 마수에서 벗어났지만 이곳저곳 풍천노숙의 세월을 보냈다.
겹겹이 경찰의 감시가 있었기 때문에 집에 다녀갈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간간히 인편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2년여의 세월동안 가족들도 가슴을 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참 무서운 시절이었어요. 김대중 선생을 돕는 자체가 죄가 되는 시절이었지. 전두환 군사정권이 김대중 선생을 돕는 사람들은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나고 곧바로 바깥양반이 몸을 피한 뒤 남은 내가 항아리 속에다 서류를 다 숨기고 몰래 태웠지요. 말 한마디 편지 한 장이 죄의 증거로 쓰이던 때였으니까” 그의 눈빛이 다시금 과거를 더듬었다.

혹시라도 집안에 물건들이 내란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죄를 더 덧씌울 수 있는 충분히 암울한 시대였다. 그는 “잡히면 구속될 것을 뻔히 알았기 때문에 숨고 나머지 뒷정리를 내가 했다”며 “그때 남편도 김 전 대통령도 참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인연 그러나 고난의 가시밭길

남편 김경의 옹은 당시 민주당 광양지구당 위원장 신분이었고 동지였기 때문에 무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남편의 평생 동지이자 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낸 순천지구당 위원장 정기영 씨는 결국 군사정권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남편과 김 전 대통령의 인연은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 때로 올라간다. 거제도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국회에 첫 출사해 승승장구하던 김영삼 후보와 호남의 작은 섬 하의도에서 태어나 어렵사리 정계에 진출한 김대중 후보가 맞붙었다.

인연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됐다. 김경의 옹이 이름 없던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아름다운 인연이었으나 가족에게는 고난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러나 동지였다. 그들은 원내총무 경선에서는 졌으나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이겼다.

72년 대선을 앞두고는 김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광양을 찾아 유당공원 유세를했다. 동지였던 김경의 옹의 집에서 민주당 지역동지들과 앞으로의 일정과 대선방안을 논의했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촛불을 켜고 회의를 했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고흥문 전 의원과 홍남순 변호사, 김대희 씨, 정기영 씨 등 숙연들이 함께 모였다.

“당시 사회분위기에 아낙이 바깥양반들 하는 일을 일일이 알 수 없었지만 민주주의 등 당시로서는 무서운 이야기를 오간 것을 눈치껏 짐작할 뿐이었어요. 40대 김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파란을 일으키자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과 그의 동지들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한 거지요”

천 여사는 “대선 이후 박정희 정권은 김 전 대통령에게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김대중 선생의 지인들에게 직접적인 가해는 없었으나 그때 당시 경찰서에서 노골적으로 감시를 했고 식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며 “형사들이 무서웠지만 나도 가끔은 사납게 대든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 대목에서 그는 옛 생각이 나는지 잠시 웃음을 머금었다.

말없이 남편의 하는 일을 지켜보는 아내였지만 가끔은 민주당 투표 참관인으로 개표장에 나서기도 했다. 정권의 서슬 푸른 눈길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누구도 민주당 참관인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종대 전 도의원 선거때 광양내려와

김경의 옹의 집안은 대대로 민주당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김경의 옹의 선친은 초대 광양군수를 지낸 김석주다. 김석주는 민주당 후보로 민의원에 출마해 당선, 5대 민의원을 지냈고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 민주당 총재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1957년 2월 민주당 광양지구당이 창당을 기념해 내려온 신익희는 직접 김석주의 집에서 친필로 글을 써 액자를 남겼고 액자는 지금도 거실위에 걸려있다.

박순천, 엄상섭, 박병호 등 민주당 동지들과 함께 김영삼 전 대통령도 그의 집을 찾은 이 중에 한 사람이다. 그렇게 민주당과 뿌리가 깊었다.
김경의 옹도 1972년 민주당 후보로 나섰으나 공화당 후보를 이기지 못했다. 사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당시 선거는 공화당에서 시작해 공화당으로 끝났다. 하지만 남편은 신원조회에 걸려 일본조차 못 나가는 처지임에도 당과 김 전 대통령에게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91년 김경의 옹의 장남인 김종대 시민포럼 대표가 전남도의원 출마하자 내려와 그들 가족과의 인연을 잊지 않았다. 그때 김 전 대통령은 할아버지 김석주와 선친인 김경의와의 인연을 설명하며 지지를 부탁했고 김 대표는 당선됐다.

이제 아름다운 인연들은 세상에 없다. 지난해 8월 남편이 하늘로 가고 올해 다시금 김 전 대통령이 영면했다. 그런 인연들의 죽음이었다.
천영심 여사는 “(김 전 대통령 같은 분은)한국에서는 다시 없을 것”이라며 “김 전 대통령의 숙원이었던 남북관계가 잘 발전이 돼서 전쟁의 위협이 줄어드는 좋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남겨진 국민들의 몫이 아닌가 싶다. 행동하는 양심이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또 “먼저 간 남편과 김 전 대통령이 이제 다시 만나 오랜만에 못 다한 회포를 풀고 있을 것”이라며 “남겨진 유족들 특히 이희호 여사도 편안하고 했으면 좋겠다”고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