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의 생활과 가장 닮아있는 게 짚문화지요”
“한국민의 생활과 가장 닮아있는 게 짚문화지요”
  • 최인철
  • 승인 2010.03.11 09:46
  • 호수 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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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룡면 양산마을 짚공예가 서광언 할아버지

빗물이 떨어지는 초가집 지붕 밑에 앉으면 옛일이 자꾸만 현실 속으로 뛰어나옵니다. 지금이야 고향마을에 가도 초가지붕이라고는 단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때는 새마을운동으로 아직 슬레이트 지붕개량사업이 있기 전이어서 마을에는 콧방귀깨나 뀌는 몇몇 기와집을 제외하고는 다들 초가지붕 밑에서 스산한 삶을 이어갔고 그 가운데 가을걷이를 마치고 치루는 이엉 얹기가 각 가정마다 매년 치루는 큰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먼저 좋은 짚을 골라 엮은 다음 두루마기 모양으로 여러 뭉치를 만든 다음 ‘ㅅ’ 자 모양의 용머리를 만들어 올리면 되는 일인데 이 새 지붕을 얹는 일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큰일이라 장정 대여섯이 달라붙어야 했지요.

지붕 아랫부분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나가다가 용머리를 얹고 역시 짚을 꼬아 만든 새끼줄로 단단하게 여미면 초가집의 새 지붕 단장이 끝났는데 아슬아슬하게 얹히는 어른들의 작업을 쳐다보는 어린이의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신기하다 그러했습니다. 지금이야 그 쓰임새가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짚은 인간의 역사와 가장 친숙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수렵생활을 벗어나 정착생활로 한 단계 진보의 발길을 옮기면서 짚은 인간생활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뿌리 깊게 자리 잡아 왔지요. 날 것의 야생이라는 옷을 벗어던진 대신 짚은 가장 먼저 인간은 의와 주를 해결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로부터 짚은 가축의 사료와 두엄, 마루와 침구류, 의복 등으로 인간이 문화의 단계를 밟아갈 때마다 다양한 쓰임새를 띠는 유용한 생활의 도구였고 더나가 그 자체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문화가 됐습니다.

바구니나 모자를 짜는 데도 쓰였고 자연색 그대로 또는 아름다운 색조로 물을 들여서, 지방에 따라 마루의 깔개나, 가구의 덮개를 만들기도 했지요 아마. 짚은 또한 볕에 말린 벽돌의 제작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물기 있는 진흙에 잘게 썬 짚을 넣고 함께 반죽한 후 햇볕에 말리거나 구워서 씁니다. 벽돌을 만들 때 짚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구약성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특히 유목을 거쳐 한반도에 정착한 우리나라에서 짚 문화는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부터 짚을 이용해 짚신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생활용구들을 만들었고 아이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짚으로 금줄을 쳐 새 생명의 탄생을 알렸지요.

또 앞서 말 한대로 초가지붕, 낫꽂이, 종다래끼, 망태기, 쌀가마니, 멱서리, 씨오쟁이, 벌멍덕, 메주끈, 멍석, 삼태기 도롱이, 삿갓, 방갓, 패랭이, 초립 등 모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 짚공예 문화를 자연스럽게 이어왔습니다. 물론 최근 서구의 플라스틱 문화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용구들은 거의 사라져 버렸지요. 편리를 따지면 별 수 없는 현상이지만 한편으론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짚은 자연이 준 가장 고마운 선물”

옥룡면 양산마을에 사는 서광언 씨는 잊혀져가는 우리지역 짚공예 문화를 이어가는 몇 안 되는 분입니다.
올해 일흔의 나이, 한 번도 고향 양산집을 떠난 적이 없는 할아버지가 멍석에서 시작한 짚공예를 지금까지 놓지 않고 계시지요.

겨울철은 물론 조금씩이라도 짬이 나거나 비가 와 농사일을 할 수 없는 날이면 손을 놀리기가 뭐해 버릇처럼 짚을 끌어당깁니다. “항구 옛날에 사랑방에 모여 앉아 멍석을 만드는데 옆에 사람들 보고 배웠던 것”이 짚공예와의 처음 인연입니다.

할아버지는 못 만드는 게 없습니다. 가마니나 멍석은 예사롭지요. 할아버지는 “평생 벼농사 짓고 살았는데 날 궂으면 짚으로 가마니라도 만들어야 하는 게 시골 사는 남정네 할 일이었다”며 오늘도 도리방석을 만드는 손길을 늦추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진짜 문화지킴이”라고 속엣 말을 했더니 “어디 웬만한 노인네들은 지금도 다 만들 줄 알지만 귀찮아서 안 만드는 것일 뿐”이라며 연신 손사래를 치십니다.

할아버지가 지금껏 만든 짚공예 작품은 부분별로만 50여 가지가 넘습니다. 주전자, 방석,  모자(남녀), 꽃바구니 커피 받침, 수저통, 커피잔 받침대 등등 할아버지의 손을 거치면 못 만드는 것이 없고 안 되는 것이 없으니 짚 앞에 선 할아버지는 전능한 창조주인 셈입니다.

할아버지가 가마니와 멍석 외에 짚공예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양산마을이 농촌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부텁니다. 전통문화랄 게 남아있지 않아서 짚공예가 필수적인 프로그램이었던 것인데 그만 할아버지가 프로그램 담당자가 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할아버지의 창작열과 예술혼이 발휘됩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건 뭐든지 (제작이)가능해. 이것을 만들려고 했다가 불현듯 생각이 떠오르면 처음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
할아버지에게는 “초가집 용모를 잘 만들면 이쁜 마누라 얻는다”는 마을 속설대로 고운 할머니와 백년해로를 하는 중이니 짚과의 인연이 어찌 남다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할아버지의 짚에 대한 예찬도 대단한 것입니다. “짚은 예날 초가집 흙벽에도 재료로 쓰였는데 접착력을 좋게 해주는데다가 습기를 빨아들이는 역할도 해 여름에도 끕끕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방안에 깔아놓는 멍석도 마찬가집니다.

지금은 차안 방석을 대신한 도리방석은 치질예방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설명도 곁들이는데 의학적 상식이야 일천하지만 그러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할아버지의 예찬이 진짜이기 때문이지요. 이제 할아버지의 작품은 광주에도 올라가 전시되고 경남 양산에서도 찾는 이가 많습니다.

그럴수록 할아버지의 손길은 분주해질 밖에요. 이렇게 되고 보니 할아버지에게도 욕심이 생기는가 봅니다.
좋은 작품 만들어 보겠다는 자신이 생각해도 전에 없던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할아버지는 “한국민의 얼이 살아있는 역사가 짚이다. 짚은 옛날의 생활이자 문화, 그리고 역사다”며 “광양에도 짚 문화관 같은 것을 하나 차려서 작품도 만들고 사람이 체험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조심스럽게 풀어놓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과거에도 그렇지만 현재에도 짚은 우리 조상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했던 자연이 준 가장 고마운 선물입니다. 다만 서서히 한 세대를 건너갈수록 우리의 곁에서 차츰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