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회갑연을 축시로 대신하다
부친 회갑연을 축시로 대신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3.11 10:10
  • 호수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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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 (9)

역사 속에는 이름난 효자가 많다.『소학』내편의 계고 명륜에 의하면, 노래자(老萊子)는 부모님께서 자식의 늙음을 보고 슬픈 감회를 일으킬까 두려워 나이 70세에 반의(색동저고리)를 입고 아이들의 장난을 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였다.
반의지희(斑衣之戱)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포의지사(布衣之士)로 살기를 작정하고 낙향하였지만 부모님의 천금 같은 한 번 웃음을 위해 과거에 응시할 정도로 효자였던 매천의 반의지희(斑衣之戱)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우야, 우리에겐 어진 아버지가 계신다

매천의 부친 황시묵(1832~1892)은 풍천 노씨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이 매천 황현이고, 차남 황연은 요절하였다. 막내가 형 매천을 스승처럼 모시며 따랐던 석전 황원이다. 두 딸은 김하술과 유덕기에게 시집을 갔다.
훤칠한 키에 온화한 얼굴을 지녔던 매천의 부친은 학문에는 그리 특출하지 못해 문의 저술은 옹졸하였다.
다만 ‘옛날 애국하던 충신이 어린 임금을 돕는 것처럼’ 자식들을 키우고 집안일에 온 힘을 다하여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한 부친의 마음을 잘 알았던 매천은 29세 때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이러한 마음을 담아 아우들에게 넋두리하듯 ‘사가(辭家, 집안 이야기)’라는 시를 한 수 지어주었다.

我親慈過人 우리 아버지는 인자하기가 남보다 뛰어나서
幾忘兒痴魯 자식의 어리석고 둔함을 거의 모르신다
苦心督詩書 애써 시경과 서경 공부를 독려하여
謬望就門戶 헛되게도 문벌 가문 이루기를 소망하시네
謂言立揚責 소위 말하는 입신양명하라 꾸짖었으니
-중략-
墜訓重爲懼 가르침을 따르지 못해 거듭 두려워하며
回頭語諸弟 고개 돌려 여러 아우에게 말하노니
吾輩有賢父 우리들에게는 어진 아버지가 계신다고

자식의 미련함을 보지 못하고 과거에 합격하여 가문 일으켜주기를 소망하셨던 아버지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아들 매천이었지만 그래도 자상하게 대해주셨다. 불초한 아들 매천은 동생들에게 아버지의 어짊을 노래하는 시를 지어 주며 호천망극(昊天罔極)한 부모님 은혜에 감사해 하고 있다.
부모의 자식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이, 자식의 부모에 대한 오롯한 효심이 잘  담겨있어 잔잔한 가족애가 느껴진다.

부친 회갑연을 축시로 대신하다.

매천 나이 38세 되던 1892년 4월 30일, 부친의 회갑을 맞이하였다.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수명은 44세, 평민들의 평균수명은 40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60갑자로 자기가 태어난 해, 즉 회갑까지 산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었다. 특히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효를 입증할 만한 가장 확실한 징표이기도 하였다.
당연히 없는 살림일지라도 조금은 무리를 해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그런데, 자식된 도리를 다하고자 매순간 최선을 다하였던 매천은 다음의 축시를 짓는 것으로 부친 회갑연을 대신하였다.

萬壽山深首夏凉 만수산 깊어 초여름에도 서늘하고
麥風槐日轉高堂 보리바람과 느티나무에 걸친 해 높은 집에 구릅니다
花明屋上丹砂氣 꽃 밝게 핀 지붕 위에는 붉은 기운이 감돌고
酒爛人間白髮香 술 거나한 인간의 백발에선 향기가 납니다
俯育兼欣臧獲健 아래의 자손들도 기뻐하고 종들도 건강하니
仁幸頌歲年康 어질고 행복하시어 해마다 건강하게 지내세요
傷貧十載無甘? 십 년 가난에 좋은 옷이 없듯이
繞膝斑衣袖漫長 무릎까지 두른 색동옷이 부질없이 깁니다

노래자가 색동옷을 입고 늙은 부모를 위해 춤을 추는 심정처럼, 부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매천의 절절한 마음이 잘 담겨 있는 시이다. 물론 필자는 매천이 이 시를 지어 올리는 것만으로 부친의 회갑연을 대신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잔치라고 이름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조촐한 회갑연을 열다보니, 죄송한 마음을 담아 시적인 표현을 한 것이다. 조선 선비의 지나친 겸손의 표현이었으리라.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내리 두 번 당하다

매천은 부친의 회갑을 축하하는 시를 쓰고 난 2달 후, 6월 28일에 외간(外艱, 부친상)을 당했다. 회갑 잔치도 제대로 베풀어 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었을 것이다.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듬해 2월 27일, 이번에는 내간(內艱,모친상)을 당했다. 천붕지통(天崩之痛), 즉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내리 두 번 당하였다.
인하여 매천은 ‘예를 좇아 법도에 따르며 근심하고 놀라고 괴로운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나 불행은 겹쳐 일어났다. 부인마저 중병에 들어 궤연(죽은 사람의 영궤와 그에 딸린 모든 것을 차려 놓는 곳)은 막내 동생 황원의 집에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매천은 삼년상 기간 중에 시작(詩作)도 중단하고 서울에 있는 문사들과 교유도 끊고 근신하였다. 매천이 생각하는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최소한의 자식된 도리였다. 철저하게 유교적이다.
1895년 4월 20일 밤, 부모님의 삼년상을 모두 치르고 난 매천은 다시 왕성한 시작 활동에 들어갔다. 상중에 사용하였던 대나무와 오동나무 지팡이를 바라보며-부친상 때는 대나무 지팡이, 모친상 때는 오동나무 지팡이를 사용함- 부모님 생각이 눈에 생생하여 한이 다할 수 없음을 노래하는 시를 시작(始作)으로.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百行之本)이라 하였다. 30대 후반, 창졸지간에 양친을 모두 저세상으로 보내고 고아가 된 매천은, 한동안 풍수지탄(風樹之嘆)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이 시기는 외세의 침투와 내부의 농민 운동이 한데 소용돌이 치고 있는 조선 후기 최고의 격동기이기도 하였다.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된 매천은 삶을 다시 한 번 다잡아야 했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고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