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에 항거한 이들을 기록하다
을사늑약에 항거한 이들을 기록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5.17 09:35
  • 호수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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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19>

한말 위정척사파의 거두이자 의병장이었던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은 ‘처변삼사(處變三事)’, 즉 망국과 같은 변란에 대응하는 선비들의 세 가지 행동 방법을 제시하였다. 먼저 거의소청(擧義掃淸), 의병을 일으켜 적을 소탕한다. 다음으로 거지수구(去之守舊), 망명가서 문화적 전통을 지킨다. 마지막으로 자정치명(自靖致命), 완벽한 은둔 또는 자결로 지조를 지킨다.

실제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이란 망국의 상황에서 당시의 선비들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였다. 매천은 이들의 저항을 시(詩)로, 또는 역사로 소상히 기록하였다. 이 중 의병은 너무 많아 다음에 따로 다루고, 여기서는 중국으로 망명간 매천의 벗 김택영과 자결 순국한 이들만 살펴보고자 한다.

김택영, 문장보국의 뜻을 품고
중국으로 망명가다

김택영은 망국의 시기가 멀지 않았음을 알고 중국으로 망명갈 결단을 내리고는, 곧바로 그의 벗 매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때가 1905년 정월이었다. 세상일을 가히 알 만합니다. 늙은 몸으로 섬놈(일본인)들의 종노릇하기보다는 차라리 강소(江蘇)·절강(浙江) 지역에서 더부살이하며 여생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대는 나와 함께 떠날 수 있겠습니까?

이 편지를 늦봄이 되어서야 받은 매천은 보던 편지를 덮고 나라가 이 지경이 된 상황을 탄식하며, 가을의 서늘함을 기다려 북쪽으로 올라가서 김택영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가리라 작정하였다. 괜한 집안 갈등을 피하기 위해 부인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노자를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6월 9일(음력), 종가의 종질(從姪, 오촌 조카)-사촌 형 황담의 독자 황신현(黃莘顯)-이 27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종질 황신현은 가까운 친척도 없었다. 평소 매천을 존경하던 홀로 남은 종질부 순흥 안씨가 매천이 목숨처럼 보인다며 의지하자, 매천은 망명 계획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권력 앞에서 당당하고 불의와 한 치의 타협도 없는 칼 같은 성격의 매천이 종질부의 부탁에 망명을 포기하였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적인 정에 한없이 약하기도 한 인물이 바로 매천이었다.

한편 9월 9일(음력), 김택영은 예정대로 부인 임씨와 아이들을 데리고 인천항을 출발하여 상해로 갔다. 그는 인천부두를 떠나면서 조국에 대한 연연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東來殺氣肆陰奸 동쪽에서 불어온 간악한 살기 들끓고 謀國何人濟此艱 어느 누가 이 환난을 구해내리오 落日浮雲千里色 저녁놀 뜬 구름은 천리에 물드는데 幾回回首望三山 몇 번이나 머리 돌려 삼각산을 바라보네
일본의 침탈로 망국의 유민이 되어 남의 나라로 망명가는 참담한 심정이 잘 담겨있다. 매천은 김택영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그해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서야 그의 망명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매천은 “김택영이 어찌 귀신처럼 그것-을사늑약의 체결-을 알았는가?”라며, 멀리 서쪽의 구름을 쳐다보며 이역만리 회남 땅의 벗이 ‘붓 휘둘러 우리나라 문장의 봉황임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한편, 김택영은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내 마음 싸늘하기로 화로 밑에 죽은 재라, 이국 땅 하늘 아래 머리 돌려 고국 보기 어렵네”라고 망국의 한을 노래하였다.

을사늑약에 자결로써 항거한
이들을 기록하다

일제의 강압적인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많은 분들이 자결 순국하였다. 민영환·조병세·홍만식·송병선 등 조정의 중신들과 학부 주사 이상철·평양 진위대의 군인 김봉학 등 하급 관료뿐만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계동의 인력거꾼도 순절하였다. 매천은 신분에 관계없이 이들의 순국 과정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그 중 전 참판 홍만식의 자결 과정은 후일 매천 본인의 순절 과정과 유사하여 주목되며, 송병선의 경우는 그의 처 ‘한씨’와 여종 ‘공림’의 이야기가 뭉클한 감동을 준다.

송병선이 상경하여 오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니 그의 동생 송병순이 형이 늦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기다렸다. 그때 한씨가 말하기를 “대감이 어떻게 살아 돌아오겠습니까? 가문의 전통과 명망을 저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아주버님은 어찌 기다리십니까?”하였다. 송병순은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한 집안에서 지낸 지 30년 동안 우리 형수님의 늠름한 기상이 이런 줄 몰랐다.”라고 하였다

송병선의 집에 공림이라 불리는 여종이 있었는데, 그를 매우 존경했다. 공림이 일찍이 말하기를“대감이 작고하시면 소인은 응당 따라 죽을 것입니다.”하여 집안사람들이 상서롭지 못한 말이라고 꾸중하였다. 송병선이 숨을 거두자, 공림은 성복(成服)하고 남편과 함께 자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남편이 피비린내를 맡고 깜짝 놀라 일어나 불을 밝히니 공림이 벌써 죽어 있었다.

부엌칼이 목에 꽂혀 있었는데 칼날이 무뎌서 썬 자국이 있었으며 목구멍이 이미 끊어져 있었다. 이게 공림의 이름이 온 나라를 진동시켰다. 송철헌은 그를 송병선의 묘소 발치에 장사지내 주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가장 훌륭한 양반은 자기 집 노비로부터 존경받는 양반이라고 한다. 송병선의 순절은 그의 처뿐 아니라 여종의 존경이 있어 더욱 빛났다. 매천은 단지 송병순의 자결 순국만이 아닌 그의 여종 ‘공림’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딱딱하고 지루한 역사가 아닌 인간미가 넘치는 감동의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민영환의 순절, 혈죽으로 다시 피어나다

『매천야록』에는 민영환의 자결 순국 과정, 국민에게 고하는 유서, 장례식에서의 에피소드 등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민영환이 순국한 지 8개월이 지나, 그가 자결할 때 입었던 피 묻은 옷에서 죽순이 자라고 있는 것을 부인 박씨가 발견한 기록은 자못 감동적이다.

민영환이 죽은 후에 그가 자결할 때 사용했던 칼과 피 묻은 옷을 모두 뒷마루에 보관하였는데, 이달에 부인 박씨가 장차 그 옷을 말리려고 하니 죽순이 그 옷에서 자라고 있었다. 모두 네 포기로 아홉 줄기였는데 가늘기가 벼마디 같고 뿌리가 엉킨 것이 실과 같았다.

마루판과 기름종이 사이에 붙어서 겨우 대나무의 모양을 이루고 있었으나 연약하여 지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도성 사람들이 온통 몰려와서 구경하여 인해를 이룬 것이 한 달에 이르렀다. 서양의 여행객들도 찾아와서 처음 죽었을 때처럼 술을 올리고 곡을 하는 것이었다. 서울 사람들은 그 모습을 그려 판화로 만들어 팔기도 했으며 청국인들은 시로 읊어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만 해도 두루마리를 이루었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