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희망 만들기의 출발이 되길
2005, 희망 만들기의 출발이 되길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3 09:38
  • 호수 17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형배 - 광양참여연대 운영위원
을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개인들에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지나간 일들에 대한 반성 속에서 새로운 설계를 하게하는 계기가 바로 새해가 주는 또다른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 광양 을유년의 첫날, 여러 단체에서 해맞이 시민들에게 떡국과 차를 제공함으로써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새해맞이 모습은 우리를 즐겁게하고 잔잔한 미소를 선물해 줍니다.

받는 이와 주는 이, 모두가 행복한 을유년 새해 첫날의 나눔의 정신이 일년내내 이어지길 소망 해 봅니다.

새해 벽두에 전해오는 진보·중도·보수의 각계 사회원로들의 희망제안이 2005년 을유년을 열어 젖혔습니다. 희망제안에는 정치권에게 정쟁중지를, 기업에게는 사람덜어내는 경영의 탈피를, 노동조합에는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의 자제를, 지식인들에게는 분열적 행태의 폐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헤맨다는 수조원의 여유자금의 향방을 고민하는 현실과 전기요금, 수도요금을 내지 못하는 가구수가 100만을 넘는 현실의 공존은 누가 뭐래도 정상이 아닌 것입니다. 정상이 아니라면 처방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도출돼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사회 원로들의 이런 희망제안은 그만큼 사회적 위기감이 절박한 상황임을 증명해 주는 징표라 할 것입니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사회 양극화의 심각함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제안들이 구체적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사실 우리는 대화와 타협 그리고 공존의 방식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룩해 본 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일제 식민지치하와 해방후 좌우의 극심한 대립 그리고 군사정권의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일방주의는 사회적 합의의 대전제인 토론의 비효율을 시민들에게 강제적으로 주입시킴으로써 맹종과 침묵을 강요했습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군사정권 시기까지 100여년 가까운 왜곡된 정치구조는 정상적인 사회구조의 발전을 가로 막았으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출범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구조로 전환되지 못한채 아직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 곳곳에 내린 과거 잔재들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엄연히 온존하고 있는 과거의 수구적 구조를 한두 차례의 정권교체로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우리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17대 국회에 걸었던 많은 기대들이 실망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연말, 국가보안법철폐를 둘러싼 처절한 싸움을 봤습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반민주성과 반통일성 그리고 반인간성에 대해 국제적으로도 이미 공인된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이토록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것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갈길이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하기도하지만 역설적으로 한발짝 성숙해 지기위한 몸부림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대화와 타협은 국면전환을 위한 일시방편이 아닌 지속가능한 사회의 대전제인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공존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를 절대시하면서 공존을 말하는 것은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광양은 대한민국에서 공존과 연대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광양만권의 통합논의가 시작되고 이런 논의에서 지역민의 적극적이 참여가 보장돼야 할 것입니다.

자칫 소지역주의의 논리에 매몰될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한다면 논의의 투명성은 합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공존과 상생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공존과 상생이란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며, 이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논어의 자로편에 나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은 공존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받아 들이되 상대에게 나와 같아야 함을 강요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이 사자성어는 현재 우리에게 개인의 성찰과 더불어 사회적 성찰의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차이점이 무언지 알아야하고 이를 위해 토론이 필요합니다. 토론은 차이점의 확인을 통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과정일 것입니다.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가 내게 또는 내가 상대에게 하는 일이지 자신이 자신을 합리화 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자칫 자기 스스로에게 내리는 합리화는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 강요나 희생만을 요구하는 억지로 변할 수 있음에 대한 경계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쉽진 않겠지만 가야 할 공존과 상생을 통한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는 2005년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입력 : 2005년 0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