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단절(홍영인 중마고 1)
소통과 단절(홍영인 중마고 1)
  • 광양뉴스
  • 승인 2010.10.18 09:33
  • 호수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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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백일장 대상

“엄마한테 들었다. 너 오늘 시험봤다고? 그래, 잘 봤냐?”
12시 30분, 하루가 가고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도 30분이 지난 그 컴컴한 밤. 일주일에 한번 볼까말까한 아버지가 이주 만에 한 말은 맘 속을 할퀴어대며 분탕질 쳤다. 무심한 목소리에 기대를 품은 눈은 내게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요구하는 숫자를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냥……. 기대는 하지 마세요.”
나는 오늘도 아버지의 기대감이 허물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아버지의 힐난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이 내 뒤에 찰싹 따라왔다. 아마도 아버지와의 다음 대화는 성적표가 나온 뒷일 거다. 아니, 대화라기보다 일방향적인 요구는 그 때 들을 수 있을 거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무언가 끊어져 있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집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 것이다. 학교와 학원을 순회하고 오면 12시가 훌쩍 넘어간다. 집은 잠자는 곳으로 전락하고 가족과의 대화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진다. 피곤해 죽을 것 같은 몸을 끌고 침대위에 눕고 다시 일어나는 생활이 반복되고, 그 패턴은 고등학교 내내 계속되다 대학에 들어가는 시점에서야 끝나게 될 테다.

그런 고등학교 생활에서 집에서 자료조사를 해야 하는 숙제는 고역이다. ‘내가 되고 싶은 것’ 즉, 장래희망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해오라고 하는 숙제가 그런 류의 것이다. 잠자는 시간을 깎아먹으며 해야 하는 숙제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집에 도착하니 11시였다.

학원을 가지 않아 비교적 일찍 집에 오는 날이라 그런지 부모님이 모두 깨어계셨다.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바로 방으로 직행하니 뒤에서 혀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태도는 날 숨막히게 한다. 대학과 직결된 일이라 아버지에게 얘기해볼까 하던 마음이 쑥 들어갔다. 그냥,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이 편하다.

두어 시간을 검색에 할애해 선생님께 내보여도 좋을 만한 구성으로 과제를 완료했다. 밤중에 인쇄하자니 소리가 시끄러울 것 같아 프린트 하는 것은 아침으로 미뤄두고 슬슬 자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허리에서 두두둑 하고 관절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직까지 안자고 뭐하고 있어?”
아버지였다. 왜 지금까지 주무시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피곤한 기색으로 아버지는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아버지가 문고리를 잡고 금방이라도 방 안으로 들어올 듯 했다.
“얼른 컴퓨터 끄고 자라”
포털사이트 화면으로 가득 찬 컴퓨터 화면에 눈길 한번 주고, 아버지는 문을 닫고 가버렸다. 닫힌 문이 눈앞에서 단단히 버티고 섰다. 아버지가 한 걸음도 들이지 않고 닫힌 문이 차갑게 빛났다.

과제를 내고 일주일 후, 선생님이 갑작스레 학부모 면담을 하겠다고 했다. 저번 장래희망 조사를 토대로 면담을 할 생각이라며 말을 한 보따리 쏟아내는 선생님 앞에 나는 멍청히 굳었다. 면담은 이번 주 토요일. 그 날은 어머니가 일을 가시고 아버지가 집에 계신 날이었다.

눈깜짝할 새에 토요일이 다가왔다. 나는 아침에 식탁에 슬그머니 올려놓고 나온 학부모 면담 안내장 생각에 조마조마해졌다. 차라리 아버지가 오시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다음 주에 모의고사를 보는지라 4교시 모두 자습인 사이 담임선생님은 면담을 한다고 사졌다. 아버지가 오시지 않았으면……. 나는 두 손을 모아잡고 빌었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아버지는 오신 모양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느이 아버님 잘생겼다라.” 하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내 얼굴은 새하얘졌다.
“잠깐 얘기좀 하자”
가방만 살짝 놔두고 도서관에 가려하던 차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해서 딸꾹질이 나올 뻔한 입을 틀어막고 억지로 몸을 끌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분명 오늘 면담에 대해 이야기할 터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고 아버지가 꺼낸 화두는 단연 그것이었다. 그러나 내 짐작보다 좀 더 심각할 줄은 몰랐다.

“너 글 쓰고 싶어?”
“..........”
“장래희망이 작가라면서, 아빠는 몰랐다.”
쿡, 아버지가 몰랐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직접적으로 들으니 속이 쓰렸다. 가슴에 무언가 쿡 박힌 것 마냥 답답해졌다.
“하지 말라고는 안하겠다만,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떠냐? 네 성적이면 더 좋은 과도 갈 수 있고……. 글은 취미로 쓰고 다른 일을 해 보는 것은 어떠…….”

“신경쓰지 마세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쏟아냈다. 그동안 묵혀두었던 감정이 한데 뻗혀 나왔다. “내가 하는 일에 관심 없었잖아요. 나도 내 꿈이 있고 되고 싶은게 있어요! 내가 뭐가 되고 싶었는지 몰랐으면서 꿈을 바꾸라고요? 아버지 눈에 보이는 건 내 성적이고 나는 안보이죠?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죠?”

그대로 소리를 빽 지르고 방으로 뛰어들어가서 엉엉 울었다. 모든게 한데 부정당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나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보는 기분이 들었다. 한낱 숫자에 나를 평가하는 아버지가 미웠다. 방문은 닫힌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있던 모든 것이 한번에 끊어졌다. 연결고리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똑똑, 방문이 두드려지는 소리는 균일했다. 아버지가 문 밖에서 멀거니 서 있을 것을 생각하니 어째 더 서러워져 숨죽여 울음을 삼켰다.
“미안하다”
“…….”
“널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빠한테 기회를 한 번 더 주지 않겠니?”
아버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한도 끝도 없이 쏟아졌다. 고등학교 올라와서 아버지에게 가장 많은 쏟아낸 게 오늘이었다. 응어리진 감정이 구체화되어 내뱉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쏟아낸 감정들은 품고 있을 때 보다 무게가 줄어들었다.

똑똑.
다시 한 번 두드려지는 문에 나는 문고리를 쥐었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빼꼼히 방문을 열었다.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을 것만 같던 발이 성큼 걸어 들어왔다. 발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