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일기] 아버지의 밤색 가방
[주부일기] 아버지의 밤색 가방
  • 백건
  • 승인 2007.01.03 21:24
  • 호수 1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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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50대에 나를 결혼시켰고. 이제 내가 그때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나의 학창시절은 가을에 여러 가지 색깔의 낙엽이 뒹굴 듯이 머릿속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참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회사를 경영하시던 아버지께서는 가끔 출장을 가셨다. 그러면 우리 온 식구는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지금 생각 하면 아버지의 그 자상하시고, 세밀하시고, 사랑이 넘치는 성품에 가슴 저미도록 감동이 일지만, 철없는 그 때는 우선 먹을 것 (우리가 생각하는 제일 맛있는 과자), 책, 옷 등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줄 선물들을 큰 밤색 가방에 가득 넣어 어깨는 한쪽으로 기울어지신 채 땀 흘리시며 끙끙 들고 오셨다.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셨던 아버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목포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선물을 사 오셨다.

우리는 아버지가 반갑기보다 그 큰 가방이 더욱 반가웠다. 아버지께서 외투를 벗고 앉으시면 우리는 가방에서 무엇이 나오나 눈을 크게 뜨고 삥 둘러앉아 가방 속을 응시했다.
 
 그때의 기분은 너무 너무 좋았다. 밤색 가방 속의 선물에 대해 한 번도 실망한 기억이 없다. 그 많은 선물 중 가장 값진 선물은 지금 생각해 보니 책이었다.

원래 책과 공부를 즐기시던 아버지셨다. 고혈압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하신 데도 항상 책과 함께 하시고 책을 손에 들면 밤을 지새우며 읽으셨다. 임종 때까지도 머리맡에 몇 권의 책이 놓여 있었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나의 학창 시절 만해도 부모님께서 월간지나 책을 사주는 집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한 달도 거르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사상계", 어머니의 "주부 생활", 내 월간지 "학원"이 출간 되자마자 사들고 오셨다.
 
"학원"월간지에는 세계명작, Classic음악. 세계명화, 시, 수필 등 다양한 장르가 소개 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때 스크랩한 명화 철이 책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맏이라서 주위에서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고, 보고 자란 것도 없지만, 아버지의 큰 가방 속의 책이 나를 이렇게 성장시켜 주었던 것이다. 내가 미술, 음악, 문학 등 여러 분야에 눈을 뜨고,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살게 된 동기도 아버지의 큰 가방에서 나온 책 덕분이다.

독서에 관심을 갖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독서지도를 열심히 하게 된 것도 역시 아버지의 큰 가방 속의 책 덕분이다.

신문 광고에 보고 싶은 책이나 신간이 나오면 얼른 서점에 들르셨다. 목포에 있는 서점을 다 돌아도 없으면 광주에 사는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그러면 나는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 재빨리 구입해드렸다. 항상 식구들의 책과, 당신이 보실 몇 권의 책을 담은 밤색 가방은 상당한 무게로 아버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어느 날 그 밤색 가방이 너무 그리워서 찾아보았더니 어머니께서 낡고 오래되어서 버렸다고 하셨다. 내심 너무 속상하고 서운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정신적으로 이렇게 키워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 큰 밤색 가죽가방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도 아버지처럼 항상 책과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아버지와 그 큰 밤색 가방이 목 메이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