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산 백은거사·암연처사 묘역 문화재 지정 시급
대소산 백은거사·암연처사 묘역 문화재 지정 시급
  • 광양넷
  • 승인 2007.01.18 00:47
  • 호수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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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전 도굴범 추정 거북상 이미 도난 당해
‘우리지역 문화를 찾아서’를 연재하면서 다시금 되뇌이는 것은 우리 광양이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역사깊은 고장이며 전세계 어느 민족문화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특수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가 빛나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승화시켜야 할 책무를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화가 없는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지 못하였다는 역사의 교훈을 눈여겨 보면서 더더욱 우리문화 창달에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다짐이다.
이에 광양신문은 우리지역 전통문화를 창달하고 잊혀져가는 우리 문화를 발굴해 이를 전승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 나갈 계획이다.

또한 본지는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우리문화창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관내 문화가족과 함께 우리 문화지킴이로서의 책무를 다할수 있도록 광양신문 부설 향토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힘쓰고자 한다.
 
 
 


 

신재 최산두 스승 최극수 선생 일가를 찾아서

백운산과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그는 기묘명인(己卯名人)으로 잘 알려져 있거니와 조선시대 두구춘(斗衢春)으로 소문난 호남 3걸(傑)의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최산두는 옥룡면 동곡리 학사대에서 10년을 계획하고 공부하다 8년 만에 바위굴을 나오면서 우뚝 솟은 백운산에 대한 감흥을 "태산압후천무북(泰山壓後天無北)"이라고 한 후 다음 구절을 잇지 못할 때 한 초동이 나타나 "대해당전지실남(大海當前地失南)"이라 하면서 공부를 더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자극받은 최산두가 10년을 채워 학문을 완성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학사대에서 10년 간 공부한 것을 토대로 1504년(22세) 진사에 올랐고 1513년(31세)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이 후 조광조를 비롯한 당대의 대학자들과 사귀면서 실력을 쌓아 출신지나 조상들의 배경이 극히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문장과 덕행으로써 홍문관을 거쳐 마침내 젊고 재주있는 신하들이 임금의 특명을 받아 공부하던 호당에 올랐다.

최산두는 당시 조광조 등이 주창한 도덕정치·혁신정치에 뜻을 같이하여 기존의 권력세력으로 부패양상을 보인 훈구파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최산두가 속한 신진개혁세력은 지나치게 도학적인 언행과 급격한 개혁으로 왕의 신임을 잃고 보수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을 받게 된다. 1519년(중종 14년)기묘사화를 맞아 당시 의정부 사인으로 있던 최산두는 37세의 한창 일할 나이에 화순군 동복으로 유배되고 만다.

최산두의 유배지에는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으로 교유하였으며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 등 후진들이 최산두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유배생활중에 적벽을 오가며 많은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이 때 그가 유명한 관광명소인 '적벽'을 이름 지었다.

최산두 선생은 유배 15년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3년 후인 1536년 5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한편 선생이 돌아가신 후인 1578년 현 광양읍 우산리에 '봉양사'가 세워져 그의 위패를 모셨으며 묘소는 봉강면 부저리에 있다.

이런 그를 어릴적 가르친 스승은 누구이며 함께 학문을 벗하며 오늘에 이른 그들은 누구일까. 광양시지 인물편에는 신재 최산두의 스승을 서극수 선생이라고 표기돼 있다.

그는 이천서씨로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서당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쳤는데 이 중 최산두를 가르쳤고 훗날 사위로 삼았다고 간략하게 기술돼 있다.
 
최산두의 스승 서극수 선생은 누구인가
 
이천서씨 족보에 의하면 서극수 선생은 세종11년 을유년인 1429년에 태어났다. 그는 종6품인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그의 부인은 풍천 노씨로 그가 1496년 10월4일 6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을 때 그는 옥룡 백계산 운암동에 ‘맹호출림좌합조견(猛虎出林坐合兆見)’형국을 광양읍지 유산도지석문(有山圖誌石文)에 쓰여있다고 후손들은 적었다. 또한 그의 비석에는 ‘후세 대대로 고을에 큰 인물이었다’고 기술돼 있다.

훗날 계미년인 1523년 10월24일 지금의 자리에 부인과 합장을 한 묘역은 484년이 지난 지금껏 오래도록 이어져 오고 있으나 현재 서극수 선생의 묘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서극수 선생은 최산두가 14세되던 해에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다. 워낙 총명해 그를 사위로 삼았다는 것이다. 광양시지에는 서극수 선생 손자인 서천일(1478-1555)을 최산두의 처남으로 기록돼 있으나 서천일은 서극수 선생의 장남인 서열(1447-1561)의 엄연한 둘째아들로 최산두의 처남이 아니라 처 조카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분의 묘역이 현재 훼손된 채 쓸쓸히 자리하고 있는데 서씨문중은 후손으로서 이를 시급히 재정비 해 최산두 선생의 스승이자 장인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내야 한다.

이는 향토사적으로도 현장 중심의 실물역사학으로 확장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백운거사 서열(徐悅)과 암연처사 서천일(徐千鎰)
 
옥룡면 산남리에 살던 서극수(徐克綬)선생은 최산두의 스승이자 장인으로 풍천 노씨와 사이에서 서열(徐悅·1447-1513)을 낳는다. 서열은 장남으로 이미 종육품의 낭관(郎官) 벼슬을 지낸 아버지 서극수 선생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글공부에 몰두했으며, 사람됨의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 굳고 의지와 절개가 뛰어나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던 것으로 기록은 말하고 있다.

그는 매부인 최산두와 도의(道義·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와 의로운 일)로 서로 만나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벼슬에 올라 적순부위(적順副尉·정칠품)에 이르렀으나 연산의 황난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옥룡으로 돌아와 백운산에 은거했다.

그는 중종때 좌의정 안당(安塘)이 화를 당할 때 이약수와 60여명이 모두 유배를 당할 때 그도 포함됐으며 최산두 선생마저 유배를 당하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호를 ‘백운거사’ 라고 했다는 것이 문헌과 광양읍지에 기록돼 있다고 전한다.

이러한 서열 선생은 부인 양씨와의 사이에 둘째 아들인 천일(千鎰·1483-1561)이 부각되는 데, 서천일은 호가 암연처사(巖淵處士)로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일찍이 그 덕을 이루었다고 암연처사 서선생의 사적에 기록돼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 나 과거를 보라는 주위의 권고에 ‘다행히 문명의 시대를 만나 과거를 통해 도를 실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그저 명예만 취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니 나는 그런 점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차라리 옛날 사람들이 농촌에 살면서 요순의 도를 즐겼던 그런 것만 못하다’며 군자감정주부(軍資監正主簿)에 천거됐으나 이를 마다하고 와룡강 위에 정자를 짓고 문지방에 암연(巖淵)이라 쓰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기록에 나타나 있는 백운산 매봉 아래 와룡강 인근 널찍한 바위에 자리한 암연정에는 신발들이 늘 가득했고 남쪽 지방에 사는 이름을 알만한 선비라면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고 할 정도여서 세상은 그를 ‘암연처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 암연정은 지난 70년 호남남해고속도로가 나면서 도로에 묻혀 버렸고 유허비는 옥룡면 운평리 이천서씨 제각인 옥평사에 세워져 있다.

현감 김중남은 암연정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경치는 영호남에서 최고이고 암연정 경치는 희양지방에서 최고다. 여지승람을 참고하면  명백히 알 수 있다.

암연정이 자리한 곳은 호랑이가 걸터앉은 듯 용이 자리 틀듯해 아래서 바라보면 높이 깎아지러 있어 오를 수가 없고 위에서 내려다 보면 평탄한 넓은 시야는 막힘이 없으며 백운산 매봉은 곧 다가오는 용 닮았다.

저 아래쪽에는  십리가 훨씬 넘는 긴 강이 흘러 안개가 자욱하고 위아래로 하늘 빛이 망경 창파와 일색을 이루고 있지만 그 근원은 백운산 옥룡골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리라.

바위는 연못의 병풍이 돼 주고 연못은 바위의 허리띠가 돼 주니 연못이 없으면 바위는 그 경치를 도움 받을 수가 없어 다만 인자만이 즐길 것이며 -중략-
 
 
서씨 문중은 우리지역 문화재의 보고
 
본지는 이번 ‘우리지역문화를 찾아서’를 취재하면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우리지역 서씨문중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우리지역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광양시지에는 옥동마을 대사산에 있는 서씨 묘역을 비석거리라고만 기술하고 있지만 앞에서 지적했듯 이곳은 최산두의 스승인 최극수 선생의 장남인 서열(백운거사)과 그의 손자 서천일(암연처사)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시대의 무덤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사료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당시 평민들은 그냥 시체를 땅에 묻고 봉분을 약간  만들어 무덤 표시를 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이곳은 비석과 망주석, 상석, 문인석, 신도비(무덤 주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등은 1561년 암연처사 서천일 선생이 78세의 일기로 눈을 감은 후 지금껏 이곳에 자리한 것으로 기록돼 묘역은 446년이나 된 우리지역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천서씨 후손들의 집에는 사료가치가 높은 고문서들이 다수 있음을 기자는 확인했다. 옥룡면 석곡마을이 고향인 서종회(49·부산 다대포 거주)씨는 지난 12일 취재차 부산에 온 기자에게 큰 선물을 안겨줬다.

그동안 선대에서 가보처럼 보관해 오던 고문서들을 사과박스에 가득 가지고 나왔는데  ‘별무사 서한규 무과병과, 광서 15년 12월’로 표기된 교지가 포함돼 있었다. 서종회씨의 조상인 별무사 서한규는 조선시대 오위영(五衛營)중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마병(馬兵)과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의 기사(騎士)들 중에서 선발되어 승급한 병졸로 이 교지는 문과 급제자에게 내리는 홍패(紅牌)로 돼 있었는 데 광서 15년이니까 1889년으로 지금으로부터 118년전 것이며 이밖에도 옥룡 서당에 다녔던 학생들의 명단(학적부)등 수백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지역의 사료가치가 높은 이런 고문서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보관 미숙으로 각 가정에서 점점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양시는 문화재 지정과 고문서 수집에 나서야
 
광양시에 촉구한다. 이제 문화재에 눈을 뜨라고 감히 주문한다. 최산두 선생의 스승이자 장인인 서극수 선생 묘역은 우리지역에 있는 문화재로 향토사 연구에 의의가 크다. 이곳을 고증해 각종 자료를 근거로 현장 중심의 실물역사학으로 확장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옥동마을 대사산에 있는 백운거사와 암연처사 묘역은 446년된 곳이다. 묘역은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재도 드물다.  묘역 주인의 일대기는 정치사요, 그 조성 경위는 당시 토목공사의 수준과  조경 및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또 묘의 자연환경과 입지조건은 전통 지리학의 실체와 ‘풍수’ 라고 하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하던 친환경적 자연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취다. 또 이곳에 설비된 문인석과 망주석, 난간석 등의 석물은 우리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지방 문화재 등록을 적극 권장한다.

아울러 광양시는 서씨 문중을 비롯 우리 시민들의 각 가정에서 빛을 보지못하고 잠자고 있는 고문서들을 기증 받아 현재 초라한 시립도서관 향토사 코너를 우리지역 것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