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매김
자리매김
  • 백건
  • 승인 2007.01.25 10:21
  • 호수 1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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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칼진 여자의 음성이 시장바닥을 핥고 지나갑니다. 생선전에서 들었던 고함소리는 채소전에 와서야 그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집에서 키운 푸성귀를 팔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5일장에서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 옆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그 푸성귀를 몽땅 사겠다며 값을 제시하였지만 흥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할머니 푸성귀를 사려고 하면 아주머니는 훼방을 놓았습니다. 보기에 좋은 것이 맛도 있으니 자기 것을 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구멍이 송송 뚫린 할머니의 푸성귀를 사면 아주머니의 험담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노골적인 표현에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서 귀머거리인가 보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푸성귀 값을 묻는 물음에 일일이 대답을 합니다.

  중년 남자가 할머니한테서 시금치며 파를 몽땅 사고 값을 치릅니다. 그러자 아주머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거립니다. 눈을 뜨고 그런 것을 사느냐는 말에 중년 남자가 일침을 놓습니다. 그렇게 장사를 하려면 가게를 차려놓고 할 일이지 왜 시장에서 약한 사람을 괴롭히느냐는 것입니다. 값을 제대로 쳐주어도 팔지 않겠느냐며 조목조목 따집니다.

그분은 아주머니가 할머니께 한 짓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머니가 제시한 값은 도둑질과 다를 바 없는 처사라면서 아주머니 물건을 몽땅 오만 원에 팔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길길이 뛰면서 물건을 제대로 보고 값을 부르라고 합니다. 물건의 질이나 양으로 보아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놓은 값과 상응한다는 아저씨의 말에 더 이상 대꾸가 없습니다.

아저씨가 아주머니를 타이릅니다. 나중에 우리가 노인이 되었을 때 젊은 사람들에게 대접받으려면 지금 우리 세대가 노인에게 잘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젊은 사람들이 보고 배워서 노인을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내 부모 내 자식만 챙기는 사람은 가족에게만 대우를 받지만 좀 더 넓은 안목으로 주위를 챙기면 사회가 훈훈해 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아저씨를 향해 박수를 칩니다. 아저씨는 시금치와 파를 덜어 옆에 계신 할아버지께 드립니다. 푸성귀를 받아 든 할아버지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서 사랑의 양식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아저씨께 또 박수를 치자 시장이 떠나가도록 악을 썼던 아주머니가 앞으로는 노인들이 옆에서 푸성귀를 팔 수 있도록 자리를 내 주겠다고 합니다. 성난 사자 같던 아주머니가 양으로 변한 모습을 보면서 얼마 전에 보았던 의자가 생각났습니다.

주부명예기자단이 제주도에서 전남 향우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여·수신 업무를 취급하는 것 외에도 23개 시·도의 농·특산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전시관 한켠에는 테이불과 의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의자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의자는 잘 손질된 마룻바닥처럼 윤이 났습니다.

공공 장소에 놓인 의자는 딱히 정해진 주인이 없습니다. 누구든 그 자리에 앉으면 주인인데 그런 의자가 윤이 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쉼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형제의 안부를 물으며 고향 사람들과 회포를 풀고, 객지생활의 고단함을 나눈 자리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객지생활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고향이 같은 하늘 아래라는 이유만으로도 정을 주고받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증인의 의자인 셈입니다.

아주머니의 채소전도 향우회 사무실에서 보았던 의자처럼 정이 물씬 넘나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소일거리로 키운 채소를 팔면서 친구도 만나고 아들딸 소식도 들을 수 있는 쉼터로 자리매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