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꽃
녹차꽃
  • 백건
  • 승인 2007.01.31 22:51
  • 호수 1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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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녹차 화분에 흰 종이조각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아 잎을 헤쳐보니 한 쪽 귀퉁이에 꽃 한송이가 피어 있었다.

 “어머, 이게 웬일이야!”
흥분을 가라앉히며 하던 일을 서둘러 끝냈다. 빨리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너머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너무너무 좋은 일이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이도 흥분된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녹차 꽃이 피었어요!”
 “녹차 꽃, 거 참 좋은 일인데~”
하면서 함께 한바탕 웃었다.

이건 분명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하루 전쯤 몰래 피었다가 나에게 발견된 거라고 말하면서, 저녁 약속에 늦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작년 봄 친구의 권유로 茶道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 시들해지긴 했지만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순천 대학과 광영에 있는 평생 교육원을 힘든 줄 모르고 다녔다.
 
 도서관에서 차에 관한 서적들을 빌려 보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다원들을 찾아가 갖가지 차 맛을 느껴보기도 했다. 금년 봄에는 차를 만드는 동생들과 함께 찻잎을 따서, 여러 차례 차를 직접 만들어 보기도 하였다.

함께 茶道를 공부하는 회원들 중에는 차밭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아 무척이나 부러웠었다.

지난여름,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흥을 출발해서 광양으로 가고 있는데 십분 후에 아파트 입구로 내려오라고 했다. 친구는 호박잎, 깻잎, 애호박, 옥수수, 그리고 녹차 나무 세 그루를 건네주었다. 녹차 나무를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그 마음 씀씀이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다음 날, 화원에서 화분 두 개를 샀다. 저녁나절 쯤, 남편과 함께 비닐봉지와 꽃삽을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 거름진 흙을 봉지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어저께 고흥에서 우리 집으로 시집 온 녹차나무 세 그루를 화분 두 개에 나누어 정성껏 심었다.
 
물을 흠뻑 주면서 잘 자라라고 나무에게 격려도 해 주었다. 수백 수천 그루의 녹차 나무가 부럽지 않았다. 그날 밤에는 안개 낀 녹차 밭을 거니는 꿈을 꾸기도 했다.

9월 초순, 보성 차 시험장에 차의 품평 공부를 하러 갔었는데 군데군데 녹차 꽃이 피어 있었다. 차나무를 선물한 친구가 고흥 차 밭에도 꽃이 피기 시작 했는데 계환씨 집 화분에 심은 차나무는 꽃이 피었냐고 물어 보았다.
 
전혀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었는데 시월의 마지막 날, 드디어 아기의 보드라운 우유빛 살결 같은 새하얀 꽃을 피운 것이다.

오늘은 우리 부부의 결혼 25주년이 되는 은혼식(銀婚式)날이기도 하다. 빨리 나오시라는 아이들의 재촉에 남편과 약속한 식당으로 가면서 파아란 가을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뒷산의 붉으스름하게 단풍든 나무들, 연보라의 들국화들이 가을을 더 가슴 깊숙이 느끼게 해 주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남편의 말을 웃어넘기며, 아이들에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얘들아, 녹차 꽃이 피었단다.”
아이들도 무척이나 놀라며 즐거워했다.

아이들이 마련해준 저녁식사는 조촐하긴 했지만 우리 부부에겐 대단한 성찬이었다. 집에 돌아와 화분을 거실로 들고 들어왔다.

보일 듯 말듯 녹차 잎 속에 묻혀 있는 녹차 꽃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가족의 웃음소리가 온 집안을 그득하게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