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3. 옥곡면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3. 옥곡면
  • 광양뉴스
  • 승인 2013.09.09 09:35
  • 호수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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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백과’풍성한 명소가 있는 마을


지형과 위치

광양읍에서 동쪽 30리에 위치해 있으며 옥곡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에 백운산의 지맥인 형제봉에서 동서로 얕은 계곡이 형성돼 있다. 서남부에는 가야산(伽倻山ㆍ歌謠山)이 감싸고 있으며 동으로는 진상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서쪽에는 중마동 지역이며 서북쪽은 광양읍 일부와 옥룡면에 접해 있다.

지형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으며 남쪽에는 진상천에서 흐르는 물과 합해 바다로 흐르면서 늪지로 형성되어 있으며 1967년 간척사업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갈대와 갯벌이 펼쳐졌던 지역이었다. 광양지역의 지질은 대부분 편마암류에 속하며 토질은 대체로 사질토양으로 배수가 양호하여 농사에 적한 한 곳이다.

옥곡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오는 동안 늪지가 넓게 형성되었으며 이곳에 샛강이 조성되어 있어 이강을 이용해 금호도ㆍ태인도ㆍ와우ㆍ길호 어민들은 옥곡 장날(4ㆍ9일)에 배를 이용해 시장에 드나들었고 일부는 농토를 구입해 농사를 지었다.

북쪽은 백운산 능선을 따라 대죽리 골짜기와 묵백리 골짜기에서 흐르던 물이 면소재지 근방에서 합수가 되어 흐르다가 진상 천과 다시 합해 섬진강 하구에서 만나게 된다. 옥곡천과 진상천이 합해지며 바닷물과 마주쳐 생성된 퇴적층이 늪지대로 형성된 곳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강과 바다가 접해지니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2번씩 간만을 이루었었으니 재첩ㆍ대합ㆍ우럭ㆍ게ㆍ짱뚱이 등이 서식하는 갈대밭과 갯벌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큰 강이 없었고 64.3Km나 되는 해안선과 접하지 못했으니 농토가 협소했던 곳이다. 이 늪지대에 기적이 일어난 것은 혁명정부시절 식량자급을 위해 이곳에 간척사업을 추진해 얻은 땅은 108ha이었다.

산간오지로 평가받던 곳에 농토가 넓어졌으니 살만한 고장으로 탈바꿈됐고 고속도로와 인터체인지·의암공단이 조성됨으로써 발전 기반을 다져가고 있다.  


                
역사적 발전상과 생활상

광양현에 속해 있던 옥곡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고 어떤 형태로 기거해 왔을까 하는 것은 오로지 유적과 유물의 근거로 확인할 수 있다. 광양지역에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곳은 봉강면 석사리 서석ㆍ옥곡면 대죽리 대치ㆍ옥곡 용곡리(흥룡ㆍ옥동ㆍ축림)ㆍ진상면 지원리 장촌 등 여섯 개 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고, 그로인해 광양지역에 구석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물증이 되는 것이다.

다만 선사시대이기 때문에 기록은 없으며 옥곡 대치에서 발견된 몸돌은 현재 조선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있다. 발견된 장소의 위치는 소재지에서 약 3Km지점 백양마을입구에서 수평천 계곡을 따라 조금가면 계곡 양편에 두 개의 계곡이 있는 언덕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

유물산포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은 약 6천여 평에 달하며 현재 전 지역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석기는 논둑 가장자리에서 수습된 것으로 이 유물은 석기로서는 사냥도구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명의 역사를 조명해 보면 고래로 사람이 살았다는 물증이 확실하며 광양현의 발전과정과 지명의 변천과정이 비슷하며 시대에 따라 지역이 합병과 분할하는 과정을 겪어 왔다. 광양이 백제 시대에 마로현ㆍ고려 때 희양현ㆍ조선조 때 광양현 그리고 광양군과 시로 변천되는 과정에서 함께 해온 지역이다.

옥곡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또는 고려시대로 추정하며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은 옥곡소(玉谷所, 신금리 주변)였다. 소(所)란 조세나 노역이 면제되는 대신 각종 특산품의 생산과 공납에 종사했던 지역이었으니 당시 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다양한 특산물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물목으로는 해태·숭어·농어·면화 등으로 품질 좋은 품목이 상당량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정조 13년 호구총수에 의하면 옥곡면 16개 촌중에는 태인동ㆍ금호동ㆍ광영동이 옥곡면에 속하였으며, 고종 9년에 옥곡면 6개리였던 것이 칙령 제13호(1896년)에 의하여 돌산군이 신설되면서 금호도·태인도가 북면의 명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3년 후에 명칭이 태인면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총독부령(1914년)으로 환원될 때 묘도(괴섬)는 여수 삼일면에 편입되고 옥곡면은 8개리로 되면서 광영리만 옥곡면에 속해 이어져 왔다. 그런 후 전라남도 조례에 의해 골약면ㆍ태금면ㆍ옥곡면 광영리를 관할하는 광양지구 출장소 설치로 골약면 광영리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이 지역이 동광양시로 승격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가 1995년 광양군과 동광양시가 통합되어 광양시가 되면서 광영동은 독립동이 되었으며 옥곡면은 7개법정리 18개 행정리로 개편이 확정되어 이어오고 있다. 


살기 좋은 곳으로 부상 

옥곡면은 위치와 지형으로 보면 광양시의 내륙에 속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옥진평야가 간척돼 농토가 확대되기 전까지는 산간지역으로 농토가 협소했고 인구는 많았으니 근면과 성실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 교통은 소통이 좋아 시장(4ㆍ9일)이 있어 화목과 산채로 연명하는 처지였으며 인근 도서민의 주식과 생필품을 만들어 판매했던 것이다. 옥곡시장은 현재 장동교 인근 늪지에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었으나 1962년 수해를 피할 목적으로 현재의 장터로 옮겨가게 되었다.

옛 장터에 해태검사소가 있었고 이곳에서 옥곡초등학교 1ㆍ2학년 학생을 모집하여 1929년 정식 출법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부터 교통은 육로는 동ㆍ서ㆍ남 방향으로 소통의 길이 열려 광양·하동·골약 방면으로 갈 수 있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이용하는 물길이 있었다.

특히 관내 5일 시장 중 가장 번성함으로써 그 터가 협소해 확장을 위한 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그리고 소재지 중심을 통과하던 경전선 철도노선을 우회시킴으로서 지역발전의 장애요인이 제거되고 시장을 통과하는 교통사고의 위험성이 없어지게 된다. 또한 그 부지를 활용하여 지역민의 편의 시설을 확장하고 문화공간을 설치함으로써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니 살만한 곳이다.

옥곡이란 지명은 구슬옥자와 골곡 즉 땅이라는 뜻을 가졌으니 땅이 비옥하여 사람살기 좋은 곳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옛날부터 옥실ㆍ옥금뜰ㆍ옥곡이라 불러왔다. 그 뜻을 이어받은 듯 농토가 확장되고 공단이 조성되었으며 교통이 사방으로 열렸으니 구슬 같은 고을이 될 것으로 믿고 기대에 찬 주민들은 활발하게 살아가고 있다.


유적과 유물   

옥곡면 지역 내에 있는 문화유산은 대죽리에서 구석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주먹돌(원석)이 발견된 되었다. 고인돌 10기의 유적지(하원 6기ㆍ신촌 3기ㆍ매동 1기)와 광양시 향토문화 유산인 장동리 쌍효 정려비가 있다.

원적마을에 청동기 시대의 매장유물인 지석묘가 남해 고속도로 건설공사 중 발견되어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하여 하원마을 앞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고인돌은 당초 발견된 곳보다 약 50m를 옮겨 부락입구에 정리해두고 발굴내용과 부장품등을 입석 판에 음각한 간판을 세워두고 있다. 이곳 고인돌에서는 구멍이 있는 돌도끼, 숫돌 17개, 석촉, 무문토기, 홍도 등이 발굴되어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 외 지역 2개소에 4기가 있어 합 10기가 보전되고 있다. 이곳 지석묘 주인공은 석기를 전문으로 제작한 장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하원다리 부근 모퉁이에 옥곡원(玉谷院)이 있으며 원을 지키던 원지기가 살았다.

원이란 공무를 여행하는 관원의 숙식을 제공했던 곳으로 우리고장 3곳이 있었는데 다압면 신원리와 옥곡원적리 옥룡 답곡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역참제도와 파발제도의 소산물로 간주된다. 이곳에 30여년 전만해도 옥곡원의 터가 모퉁이 대밭 곁에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터마저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명소가 있는 마을

신촌마을 시설물로는 현재 옥곡초, 옥곡역, 팔모재(八慕齋, 진양정씨 재각)가 있고 옥곡초 부지 안에 초등학교 설립(1929년)유공자 유채규, 박성근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옥진관을 건립 기부한 조소순여사의 송덕비가 있고 마을 앞 도로와 철길사이에 지석묘 3기가 있다.

대리마을에는 대죽리 보건진료소와 옛 옥곡소가 있던 곳(대죽리 175번지)이며 1924년 신기마을로 이전했고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선유리 오류마을은 하선 건너편에 있으며 골약면 중군리로 가는 중간에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도요지가 있었던 곳이다.

주민 문홍문의 증언에 의하면 마을회관에서 동쪽 200m 지점에 있는 축사를 신축하기 위해 정지작업을 하는데, 옹기가마에서 남았던 재무더기가 발견되었으며 이곳에 1기의 가마가 있었고 5백 미터 떨어진 위쪽 산자락에 또 한기가 있었다며 현장에서 청색이 가미된 옹기 편을 주어 보여 주었다.

금촌마을은 지형이 징게미(새우) 혈로 뒷산 높은 봉은 머리요, 몸체는 마을이고, 발가락은 동쪽으로 뻗어있는 두 가닥의 뿌리 형상으로 되어있다. 약 200년 전에 진양정씨가 입촌했고 연이어 인동장씨도 입촌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래전 노인들은 초동들에게 마을 안에 있는 묘에서 놀지 못하게 하면서 그 묘는 부원군 묘라 했다는 전언에 의하여 사료를 보니 조선조 5백년간 27대로 이어진 왕비로 정사에 수록된 분은 어씨 한분이 있으며 20대 경종왕의 둘째부인 이다.

이 비문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경종과 광양현감을 지낸 어영담과 왕비의 출생에 관련이 있는지 고찰해보니 두 가지의 가설에는 150년 이상의 간격이 있어 무관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입석 비를 전문가는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마을에 어씨묘 4기가 있었는데 1992년 어씨 문중에서 3기만 이장해 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어씨 문중은 묘를 찾기 위해 몇 번 이곳을 방문해 수소문했으나 찾을 구수가 없게 되자 묘를 쓴 도면을 가져와 확인한 후 이장해 갔다는 것을 동민은 증언해 주었다. 왕비로 간택된 낭자는 가마를 타고 떠났고 임금님이 출생지를 하명하자 무구장에서 왔습니다. 해서 금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경종이 지은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니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연구 가치를 안고 있는 것은 부원군 묘, 낭자가 가마를 타고간점, 묘 이장 때 도면을 이용해 찾았다는 것,‘함종어시지묘’란 표지석, 금촌이란 지명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의암마을은 옷바우(衣岩)라고도 불러져 왔으며 정자나무가 있던 큰 바위에 어사 박문수가 이곳을 지나(1727년)갔다고 한다.

그때 이곳에 쉬면서 의암이란 글자를 직접 새겨두었다는데 지금은 찾을 수가 없으나 이로 인해 마을 이름을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문헌에 의하면 옥곡면 지역에 궁방전이 있었고, 월앙동 인근지역인 정자나무 길 앞에 있었던 들을 주민들은 궁답 또는 궁갯들이라고 부르는데 50두락 정도의 소규모로 옛 왕실에서 관리하던 궁방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진월면 오사리 궁방전에서 수납한 곡물을 보관하던 창고 3동 있었으며 관리자 이후공이 있었으니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연화도수라는 우물이 약 820년 전부터 사용해 오고 있으며 수질이 아주 양호했다. 명주마을은 현재 옥곡면 중심지역으로 시설물은 옥곡면사무소·치안센타·옥곡단위농협·보건지소 소방서 출장소·옥곡시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면사무소는 신기마을에서 1960년 현재 위치로 이전해 왔다.

대리마을은 호구총수에는 대리촌 이라 했고, 왕명으로 제작된 광양현지도에 의하면 이 마을에 사창(社倉)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죽치리ㆍ오동리ㆍ백양리와 합병으로 대죽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여정 때문에 18개 마을을 모두 탐방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조사 자료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