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9. 금호동 ②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9. 금호동 ②
  • 광양뉴스
  • 승인 2013.11.17 23:18
  • 호수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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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동, 남해안 조용한 어촌이 세계굴지의 제철소로…

 

 

금호동 주택단지 전경


광양제철소 건설

 

금호동은 상전벽해로 인해 신도시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역사는 짧지만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가고 있다. 옛 금호도는 4개 마을로 구성돼 있었고 인근에 쌍둥이 같이 태인도와 함께 살아왔던 곳이다.

생활터전은 약간의 논과 큰 동산에 4개의 능선은 모두 밭이었고 남쪽 양지바른 능선자락에 염전이 있었으며 오래전에 염소목장도 있었던 곳이다. 남쪽으로 펼쳐졌던 갯벌과 서남쪽으로 형성된 모래 등사이로 샛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을 큰 등이라 불렀고 여기는 김을 생산하기 위해 한로(寒露) 때 섭(갈대, 산죽, 대족, 밤나무 가지)을 박아두면 해태 포자가 착상해 자라면 김의 원료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제철소 부지공사로 사라지고 없는 삼화도는 와우 쪽에 있었고 1가구가 살았던 유인도(有人島)였으며 이곳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지세와 지형은 높드리(자연제방)와 오미(배후 늪지)형으로 매우 특이하게 형성된 곳이다. 그러니 높은 산 깊은 계곡은 없었으나 2천명을 상회하는 인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근면과 절약의 지혜가 필요했었다.

금호동 분수대



다행이 앞쪽에 황금어장이 펼쳐져있어 삶의 터전으로 삼았으며 전답에서 생산된 것은 보리ㆍ밀ㆍ콩ㆍ팥ㆍ감자ㆍ고구마가 주곡이고 그 외 김을 비롯한 해산물로 살았던 지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스러운 섬이 이웃 태인도 일부와 함께 원형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주거지가 만들어졌으며, 원주민은 모두 이주해가고 새로운 전입자로 채워져 살아가고 있는 금호동이 되었으며 2012년 말 호구 5186호 인구 1만5148명의 거대 동으로 발전했다. 

행정구역으로 태인동에 속해 업무가 처리되던 섬이 어느 날 갑자기 쇳물공장 터로 변하게 되는 기적을 이룩했으니 그 사연을 살펴본다. 8.15해방을 맞이했으나 법의 미비와 치안의 부재로 사회적 혼란이 가증될 때 여순반란사건과 6.25동란이 연이어 발생했으니 백성들의 삶은 고단했다. 이때 주민의 생명과 안정을 위해 이주정책이 실행됨에 따라 산촌사람들은 소개명령에 따라 이곳 섬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겪고 사회가 안정되어 갈쯤 5.16혁명이 일어나고 새로운 체제가 결성되면서 근대화사업을 추진하게 됐던 것이다.

그로인해 국가 기간산업인 철강 산업이 필요했다. 처음 추진한 모회사는 포항제철로 1968년 4월 1일 자본과 기술 그리고 경험도 없이 불모의 땅에 제철소 창업을 선언하게 된 것은 불굴의 도전정신과 창조적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일만에 첫 삽을 뜬지 3년 만에 년산 103만 톤의 철을 생산했던 것이다. 그리고 급속하게 근대화사업이 추진되면서 주택, 항만, 군사, 교통의 건설 사업이 확장되어 감에 따라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자 정부는 1981년 11월 4일 금호지구 일원에 포항제철 제2공장건설을 추진하겠다는 발표를 했던 것이다.

금호동 사랑아파트



처음 후보지는 서해안 지역이었으나 타당성 조사를 한 결과 이곳은 제철공장 건설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지리적 요건과 주위의 환경이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이곳 광양만이 적지로 판명되었던 것은 당시 일본과 중국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으며, 수심 25m내외로 바닥은 암반층이었고, 부지조성 투자비가 가장 적게 소요되며, 대형화물선 출입이 용이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적합한 조건에 따라 정부는 금호지구 일원에 포항제철 제2공장 건설을 확정해 발표했던 것이다. 일은 급속도로 추진되어 이주보상 문제 해결과 준비를 마치고 부지조성기공식을 가졌으며 3년 후인 1987년 5월 7일 준공식을 가졌던 것이다. 일화 한 토막은 공장부지 타당성조사를 위해 온 외국인 기술자가 지명에 쇠금자(金)가 들어있는 장소를 찾았다는 설이 있다.

거주하던 주민은 고향을 떠나기가 어려웠지만 국가 기간산업을 추진함에 있어 동참해야 한다는 설득과 거대한 제철소의 입지로 최적지라는 기대감으로 모든 것을 접었던 것이다. 이주보상 때 애로사항도 있었지만 발전하는 사업에 고향땅을 물려준다는 자부심도 기여했던 것이다.

     
   
금호동의 봄

보상이 완료됨에 따라 이주가 추진되면서 주민 304 세대 중 42세대는 개별이주를 희망했으며 나머지는 인근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광영지역과 중마동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제철소건설이 시작되자 유입인구(노동자ㆍ사업자ㆍ관리자) 2천여 명이 운집하게 됨에 따라 1996년 1월 1일 광양지구 출장소가 설치되면서 광영리ㆍ태금면ㆍ금호도까지 포함된 것이다.

당시 섬 전체주민 수는 2064명이었고, 금도초등학교(1937~198 4년)는 37년간 건재했으나 제철소 건설을 위한 부지로 매입되어 사라지고 학생은 광영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매립된 섬은 태인동 관할에 있던 애기섬ㆍ모래섬, 돌섬, 북섬, 지신도 등 5개와 길호도에 속해 있던 안섬 일부와 날개섬과 와우리 앞에 있던 삼화섬을 합해 11개 섬을 폭파해 얻은 돌로 14.8㎞의 둑을 쌓아 454만평의 부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또한 지금 제련공장 터에 직격 40cm 길이 20m의 모래기둥 25만개(총 연장 22.6Km)를 밖아 바닷물의 유입을 막고 거대한 공장의 압력을 소화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한다. 제철소 건설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단기간에 세워진 광양제철소는 1기 설비공장이 완공됐을 당시 연간 1180만 톤 철강이 생산됐다.

이제는 세계적으로 으뜸가는 제철소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자랑스럽다. 그리고 준공 된지 30년이 지난 2012년 말 통계를 보면 철의 조강생산은 연간 2조144만6천 톤이며, 영업이익은 1일 48.8억이고, 외주파트너 49개회사 고용인원은 7900여명에 달하고 있다.

이곳은 30년 전만해도 남해안의 조용한 어촌이었던 작은 섬이 지금은 세계굴지의 제철소가 세워질 것을 누군들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높이 솟은 굴뚝은 15년 동안 꺼질 수 없는 용광로이며 오늘도 양질의 철을 생산하고 있다. 먼 훗날 후손들은 우리에게 역사를 창조했다고 찬미할 것이지만 이곳을 떠난 실향민들은 애증의 향수도 아직 남아있는 실정이다.

금호동과 태인동에 관한 사료는 섬시리즈 ① 천지개벽의 땅『태인도와 금호동』은 사단법인 향토문화 진흥원에서 1994년 발간(김정호, 김경수, 곽유식, 정경성 공저)한 것이다. 금호도는 이미 제철부지로 그 형체가 완전히 변화된 뒤라서 과거의 자료와 구전에 의한 내용이라 아쉬운 점이 있기는 하나 생활상을 상당히 세밀하게 기록된 것이며 근세사의 기록으로 간주된다. 


금호동의 생성

금호동은 새로 태어났으며 현재 세대수 5120호이고, 인구는 1만5422명으로 중마동ㆍ광양읍에 이어 세 번째 큰 동으로 발전했다. 금호동은 1989년1월1일 법률 제4050호와 광양시조례 제 88호(동광양시 동의 명칭 및 관할구역에 관한 조례)에 의하여 금호동ㆍ금당동으로 분리되었으나 1988년 11월 25일 광양시 적은 동의 통폐합으로 2개동이 하나로 되면서 금호동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주거지는 아파트와 연립ㆍ빌라가 89%(5234호)이며 11개단지에 18통 271반으로 조직되어 있다. 공공기관은 초등학교 2개ㆍ중고등학교 각 1개씩이며, 우체국과 은행 2곳씩이 있으며 광양축구전용구장(드래곤 구장)과 백운아트홀이 있으니 생활이 풍요롭다.   

교통의 수단은 교량이 4개(금호대교ㆍ태인교ㆍ길호대교ㆍ이순신대교)가 있으며 금호대교는 옛 광영 하광부락의 도촌과 금호 도촌을 연결한 대교로 맨 처음 건설되었으며, 태인교는 금호도와 태인도를 연결한 교량으로 광양제철소 제2문 곁에 있다.

그리고 길호대교는 금호동과 중마동을 연결하면서 컨부두와 광양ㆍ순천은 물론 화물전용도로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순신대교는 현수교로 2012년에 개통되었고 광양과 여수를 소통시키고 있다.

금호동에 관한 기록은 광양읍지와 광양시지에 옛 지역인 4개 마을(도촌ㆍ내동ㆍ대동ㆍ양도마을)로 나누어져있다. 당시의 지형은 물론 생태적환경과 생활상을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으나 그때 상황을 거주했던 주민 또는 인근에 살았던 50대 이상은 추억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전입이나 이주해온 동민은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즉 양도ㆍ삼화도는 유인도이며 그 외에 무인도 3개가 있었으나 설명을 해도 모형과 위치를 대부분의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실정이니 역사를 다시 써야한다는 방창성 동장의 말에 공감하면서 탐방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