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총괄②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총괄②
  • 광양뉴스
  • 승인 2014.01.13 10:09
  • 호수 5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록 누락된 곳 많아 … 12개 읍면동 지(誌) 발간 필요, 문화시설 부족 탓 말고 ‘문화ㆍ예술’ 투자 확대해야

광양향교

광양의 교육ㆍ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광양향교가 건립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영조 41년(1765)과 순조 17년(1817)에 풍화루ㆍ대성전 등이 중건되었다. 현존하는 향약안(鄕約案) 등에서 향촌 여론기구로서 향강(鄕綱)을 수립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의 서원 설립 추세에 따라 선조 11년(1578년)에 설립한 봉양서원(鳳陽書院)은 최산두(崔山斗)ㆍ박세후(朴世煦) 등을 배향했는데,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7년 조산(朝山)에 옮겨 복원되었다. 정조 9년(1785)에는 향교 가까운 남쪽에 양반층의 독서와 집회 장소로서 양사재인 흥학재(興學齋)가 건립되었다.

근대 초등교육기관의 효시는 1907년 3월 정인표(鄭寅杓)ㆍ유치룡(柳致龍)ㆍ강주순(姜周淳) 등이 다압면 금천리에 설립한 사립 광동학교(光東學校)이다. 1913년에 폐교된 뒤 금천사숙(錦川私塾)으로 다시 개교해 1943년에 다압북국민학교가 되었다.

1907년 9월에는 군수 서상붕(徐相鵬)이 광양읍에 세운 사립 희양학교(曦陽學校)가 개교했으며 1910년 인가 후 공립 광양보통학교(서초등학교)-진상보통학교(1919년)-골약보통학교(1921년)-옥룡보통학교(1922년)-진월보통학교(1926년)-옥곡보통학교(1929년) 순으로 설립되었다.

2013년 말 현재 공사립을 합해 초등학교 28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8개교이며, 광양보건대학교와 한려대학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공 도서관 2개, 일반 공연장 2개, 시민회관 1개, 백운 아트홀ㆍ복지회관 2개, 노인대학 2개, 경기장 시설로는 실내체육관과 종합경기장 각 1개와 국제규격의 수영장 1개가 있다. 종교시설로는 불교사찰 29개, 성당 3개, 교회 129개, 원불교교당 1개, 유교교당 1개가 있다.                         


민속ㆍ문화

민속 문화로는 고로쇠 약수 제는 매년 3월초 경칩이 되면 인근 사람들이 모여 약수를 받아 놓고 하루를 즐기며 마시는 행사가 백운산 약수제이다. 이 행사 기간 동안 궁도대회·국악공연·농악놀이가 계속되는데, 이를 위해 백운사가 건립되었다.

용지큰줄다리기


전어축제는 매년 10월 망덕포구에서 개최되며 1999년부터 시작돼 이어져오고 있으며 신답부락민들이 전어 잡는 노래를 보조하고 있다. 불고기축제도 매년 10월에 광양읍을 중심으로 개최고 있다.

민속놀이로는 버꾸놀이가 있으며 다른 지방과의 차이점은 북 놀이가 더해진다는 것이며, 또한  김매기농악을 할 때 마을 간에 접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김매기농악놀이는 양편이 기를 꽂아 각각 진지를 만들고 나팔을 불어 접전을 한다.

용줄다리기는 태인동 용지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 3일 내에 줄다리기가 실시된다. 놀이를 옛날에는 현청 앞에서 했는데, 용줄을 그 곳까지 운반하면서 치는 농악놀이가 장관이었다고 한다. 고를 걸고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태인동민이 양편으로 나뉘어 줄을 끌기 때문에 줄의 길이가 아득할 정도였으며 승리한 편에게는 술과 안주를 대접하며 상금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 농경문화의 유산이며 정기적으로 지내는 사직제(석사리 명암마을)ㆍ서낭제ㆍ여제 등과 상황에 따라 수시로 지내는 기우제가 있었다.

이때는 지방 유지를 제관으로 뽑고, 제관은 목욕재계하고 심신을 청결하게 한 다음 제사에 임한다. 그 동안 마을 주민은 문전에 황토를 깔아 비 내리기를 기원한다. 사직제(社稷祭)는 사직단에서 토지신과 곡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고, 서낭제는 서낭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재난을 없애고 복을 빌며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여제단은 한 해의 액과 질병을 막기 위해 여신(돌림병의 神)에게 제를 지내던 것이며, 마을 사람들은 제사를 정성스레 모시기도 했다.


설화ㆍ민요

우리고장의 설화로는「최산두의 전설」ㆍ「옥룡사의 연기설화」ㆍ「살구나무 귀신이야기」등등이 전한다.「최산두의 전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백운산의 세 정기 중 하나인 봉황의 정기를 타고난 한림학사 최산두는 어린 시절 고개(峙)를 넘어 공부하러 다녔다.

그 재는 낮에도 무서운 곳이었는데, 어느 날 비바람이 몰아쳐 최산두가 바위굴로 몸을 피했다가 그 곳에서 들으니 귀신들은 저이들끼리 이곳에 한림학사가 오셔서 나갈 수가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산두는 그 뒤에도 계속 그 고개를 넘어 다녔는데, 하루는 예쁜 처녀가 유혹했다. 서당 훈장에게 그 말을 했더니 훈장이 처녀의 입에 있는 구슬을 빼앗아 삼키라고 했다. 훈장의 말대로 했더니 처녀는 여우가 되어 울며 달아나고, 최산두는 여우구슬 덕으로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고로쇠약수제

「옥룡사의 연기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말에 도선이 상 백운암에서 종이로 학을 접어 날렸더니 백계산의 큰 못에 떨어졌다. 그 못에는 청룡과 백룡이 살고 있었다. 도선이 이번에는 활을 쏘자 청룡은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백룡만 남아 버티다가 거듭 쏜 화살에 눈을 맞고서야 승천하였다.

도선은 그 곳에 옥룡사를 세우고는 백씨 성을 가진 스님은 절대로 들이지 말라고 일렀다. 그런 뒤에 성명부지의 한 중이 들어왔는데 절에 불이 나서 타버렸다. 그 중은 성이 백씨였고, 그 재난은 백룡이 꾸민 보복이었다고 한다.

「살구나무 귀신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도월리 월평마을의 백씨 집에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어찌나 큰지 무서워서 베어 버렸다. 얼마 뒤 백씨네 출가한 딸이 자식을 얻고자 산제를 지내려고 메를 짓고 있는데, 더벅머리 총각 하나가 와서 피가 흐르는 다리에 솥에서 넘치는 밥물을 찍어 바르면서 자기는 베어진 살구나무 귀신이라고 하였다.

귀신은 백씨의 딸에게 이르기를 장차 아들 셋을 낳을 것이나 10년 뒤에는 자기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녀는 아들 셋을 두었으나 모두 서른이 못 되어 죽고, 그 뒤 이 마을의 백씨네 집안은 손이 끊기고 말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더러 있으나 옥곡 금촌마을에 전해오는 구전(口傳)은 이 마을에 살던 어씨(漁氏)가문의 처녀가 방년의 나이 때 왕비로 간택되어 궁궐로 가마를 타고 갔다는 전절이 전이 있다. 다만 조선조 5백년 중 어씨가 왕비로 된 사람을 20대 경종의 둘째부인이 있기는 하다.

이번에 시 전 지역을 답사해 사료를 정리해 보니 우리고장에도 상당한 문화유산이 잡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라져가고 있는 문화유산의 실체를 확인했고, 노령자로부터 그 지방의 역사ㆍ문화ㆍ설화ㆍ구전 등을 수집할 수 있었음이 소득이었다.

앞으로 서둘러야 할 일은 사직단ㆍ서소정 등 10여 곳은 고증을 거쳐 복원해야하고, 유적지인 하포 장리 끝 외 10여 곳에는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골약동 사동마을과 다압면 고사부락에 묻혀 있는 기와 굽던 가마는 그 형체가 선명하게 남아 있으니 지표조사를 실시해 발굴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금호동은 역사를 다시 써야할 처지이니 다른 읍면동의 역사와 문화도 누락된 부분이 있는 것을 보면 12개 읍면동 지(誌)를 서둘러 발간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올해는 돌산군에 속했던 태인면이 해제되어 묘도가 여수로 편제된 백년이요, 진하면 월포면이 합해 진월면으로 통합된 1백년이 되는 해이니 옛 곳(방죽ㆍ금동)에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  

광양시는 문화시설이 미흡하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지만 이을 서둘러 추진함에 소홀한 면이 있다. 이제 15만이란 인구를 포용한 중견도시라면 문화시설의 수준도 시민의식 수준에 적합해야할 것이다.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먼데 투자에 머뭇거리고 있다. 투자 없이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 전체수석을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역사 발전과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해야 할 시점이니 기초조사를 하고 그에 따라 좋은 계획을 수립하면 시민들은 뜻을 한데 모아 문화예술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연간 2% 남짓한 예산으로 문화ㆍ예술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경상비에 해당하는 예산이다. 적어도 앞으로 5년간 예산액의 5%이상을 투자해야 이웃지역과 균형이 맞아 질 것이라 믿어진다.

특히 신세대들은 더 큰 전시장ㆍ공연장이 있는 문화 중심지 조성이 절실하다고 믿고 있다. 젊은 층이 대부분인 동부지역에서는 우리문화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실정이니 문화와 예술의 번성이 시급해 보인다. 이것으로 12개 읍면동을 돌아보고 종합적인 채록을 마치고자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