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욱 교수와 윤동주 시인의 만남
정병욱 교수와 윤동주 시인의 만남
  • 광양뉴스
  • 승인 2014.07.21 09:43
  • 호수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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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의 대가 정병욱 교수 5

조동래 시인ㆍ수필가
이 장에서는 정병욱과 윤동주와의 만남을 병욱이 남긴 글을 참고해 대학시절을 추적해본다. 병욱은 동래고보 5학년을 졸업하고 1년 후인 1940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입학은 두 가지로 시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시험제도였고 다른 하나는 무시험제도였다. 병욱은 시험으로 입학했고, 상위 그릅이었으며 학적부에 기재된 주소는 전남 광양군 진월면 망덕리 22번지였으며, 아버지 직업은 주류양조업이었다. 종교는 없고 자산은 10만 원(당시 고등문관 월급이 100원임)이였으니 그는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던 것이다.

그런데 연희전문학교 문과는 원래 4년 과정이었지만 병욱이 졸업할 무렵에는 전시 비상조치에 따라 3년(상과·법과는 당초부터 3년제)으로 단축되어 1944년 3월 졸업을 하게 되었다. 병욱이 입학한 해 기숙사생활을 하고 있는 어느 봄날 아침, 3학년이던 윤동주가 기숙사 3층 병욱이 있는  방으로 찾아왔다.

손에는 잉크냄새가 아직 풍기는 조간신문이 들려 있었고, 첫마디는“신문에 난 글을 잘 읽었습니다. 평소에도 글을 자주 쓰십니까? 라고 말한 뒤 같이 걸을 수 있느냐 ”는 의견을 물으니 병욱은 황공할 따름이라 같이 걸었다.

이후로 두 사람은 일심동체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9개월 동안 기숙사와 하숙생활을 함께 하며 형제처럼 정을 느끼며 살았다고 병욱이 쓴 수상집《바람이부비고 서있는 말들》에「잊지 못할 동주 형」,「동주형의 편모」,「동주형의 발자취를 밟으며」,「동주형의 시 세계」란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뿐만이 아니라 그는 동주형의 일상생활이란 글에서“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의 혹독한 식량정책으로 기숙사의 부식은 악화 되어 날이 갈수록 조잡해졌다. 학생들은 맹렬히 항의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기숙사는 당국의 감시가 철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말뿐이다. 동주가 4학년으로 내가 2학년으로 진급하던 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숙사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마침 내 친구의 알선으로 종로구 누상동 마루터기에 조용하고 조촐한 하숙방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숙집 형편에 의해 한 달 후 떠나야했다. 좋은 하숙집이었는데, 실망과 아쉬움이 가득 찬 마음으로 두 사람은 새 하숙집을 구하려고 나섰다.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 전신주에‘하숙 있음’이라는 광고 쪽지를 발견했다. 우리는 그 집을 찾아들어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 송(金 松)이라 씌어있었다. 우리는 서로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 송 바로 그분이었다. 우리는 1941년 5월 그믐께 소설가 김 송의 식구로 새로운 하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의 부인 조성여(趙姓女)여사는 음악가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주노래를 들려주었고, 식사가 끝나면 대청마루에서 홍차를 마시며 담론을 논하기도 했다. 이때가 학창시절 중 가장 알차고 보람찬 시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아침 식사 전에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으며 세수는 골짜기 아무데서나 했다.

이런 연유로 종로구청에서는 2013년 10월 자하문 곁에 윤동주 문학관을 개관했으며 유품과 유고시집을 진열해두었는데, 하루 7~8백 명의 관람객이 거쳐 가고 있다. 이것은 누상동에서 하숙을 했다는 것과 인왕산을 이용해 산책을 했다는 인연의 끈을 희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해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학기에 올라와 우리는 다시 이사 짐을 꾸리고, 이번에는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하숙생은 7~8명이었고 전문적인 하숙집이라 퍽 당황스러웠으며 어딘가 어설프고 번거롭고 뒤숭숭한 그런 분위기였다. 게다가 졸업반인 동주형의 생활은 무척 바쁘게 돌아갔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일들이 겹치고 겹쳐서 동주형은 이때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북만주 용정에 있는 집도 순탄치 못한 일이 터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있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동주는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조동래 시인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