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7> 송강 정철의 관록으로 본 연보
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7> 송강 정철의 관록으로 본 연보
  • 광양뉴스
  • 승인 2016.03.18 20:02
  • 호수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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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시인ㆍ수필가

사람은 일생동안 시련과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 더더욱 조선조 때 정치인의 생애는 예측하기 어려운 운명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이때 정치인은 붕당(朋黨)의 피해로 직접정치를 하지 않은 경우라도 상대 당파의 모함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런 환경 속에서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송강은 세 번의 유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풀려나면 고향같은 담양으로 하향(下鄕)하여 몸을 추스르고 장고하며 학문에 진력했다. 아버지의 유배가 풀렸기 때문에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창평으로 아버지와 함께 하향하였으며 이를 합해 네 번이었다.

당시의 유배형은 여러 가지 형이 있었고 죄의 경중에 따라 유배지의 거리 (百里ㆍ五百 里·千里)등으로 결정되었고 출발하기 전에는 태장을 맞는 것이 보편적인 관습이었다. 또한 국가에서 별도의 지시가 없으면 유배 자(죄인)가 도착하는 해당 군·현(郡·縣)에서 관리(의·식·주와 감독)하는 제도가 있었고, 또한 지방의 토호들이 유배자의 관리 책임을 위임받은 경우가 있었다.

그 외에 가족이 죄인과 함께 유배가 끝날 때 까지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하는 중죄인은 지방관이 관리를 위임받아 의식주를 책임졌던 것이다.

松江 鄭澈이 지었다는 수월정기(水月亭記)가 광양읍지光陽邑誌(2014년 2월 3일)번역본이 있어 이를 옮겨보면 : 사대부가 벼슬길로 나아가서 세상에서 더 이상 쓰임이 없으면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시골에 묻히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이름난 산과 아름다운 물이 있는 곳을 골라 집을 짓고 자연의 즐거움을 누린다. 한편으로는 맑고 한가하며 고요한 즐거움을 누리고 또 한편으로는 시국을 근심하고 임금을 그리는 정을 드러낸다. 구양수(歐陽修)가 영상에 있었던 것과 두기(杜祈)선생이 휴양에 있었던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전 나주목사도 본관이 광산인 정 현감은 나이 50에 세상에서 버려졌다. 선 대부 옥천선생(玉川先生)의 별장이 있던 광양에 자리를 잡았는데 조상의 여막과는 40여리 떨어져 있었다.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정자를 세우고 수월이라고 이름을 하였다. 송강은 1578년 5월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11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그 때 벌어진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의 옥사 처리를 문제로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입고 직무가 바뀌었다.

다음 달 성균관 대사성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지만 옥사 이후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선조 13년(1580)1월에 강원도 관찰을 제수 받고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이 무렵 관찰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도(道)내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고 개혁했으며, 영월 땅에 표석(標石)도 없이 버려진 단종의 묘를 수축하여 제사를 드리게 했다. 그리고 강원도 내 민풍(民風)을 크게 진작시키고「훈민가」,「관동별곡」등을 지었다.

46세(1581년) 때 외직에서 돌아와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 정승 노수신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답(신하의 상소에 임금이 내리는 답)을 짓게 되는데, 그 내용이 합당치 않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동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자 네 번째 창평으로 낙향해 버렸다.

그러나 12월에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세액과 부역의 실상을 조사 개혁하니 백성들은 크게 칭송했다. 그때 전라도 도사로 있던 조헌(趙憲)과 처음만나 우여곡절 끝에 돈독한 교분을 쌓게 되었다.

송강이 세인을 놀라게 한 것은 귀양생활에서 풀려나 얼마 있지 않으면 왕(王)인 선조의 부름을 받고 출사하게 되는데 능력을 펴보지 못하는 짧은 기간에 다시 동인의 모함이나 의금부 또는 사헌부의 주포로 형이 가해지고 유배지로 떠나는 운명이 반복되었다.

결국에는 율곡까지 도울 수 없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