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9> 송강 정철의 관록으로 본 연보
<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9> 송강 정철의 관록으로 본 연보
  • 광양뉴스
  • 승인 2016.04.01 20:34
  • 호수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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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시인•수필가

  세 번째 낙향을 했으나 46세가 되던 해 12월에 왕의 특명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예리한 판단으로 관찰한 그는 도내 세액과 부역의 실상을 조사하여 개혁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큰 칭송을 받았다. 그 무렵 조헌(趙憲)과 처음 만나 우여곡절 끝에 돈독한 교분을 쌓게 된다.

  그리고 연속 승차하였으나 더없는 지기였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곡함은 물론 애도의 시를 지었다.

 50세가 되자 판돈령으로 직무가 바뀌자 동인 세력들로부터 논핵을 당했으나 임금의 비호로 무사했다. 8월에는 동인들로부터 조정내부에 파당을 만들어 나라 일을 그르치려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그들의 공박과 사간원 및 사헌부의 논핵을 입고 마침내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인물들과 벼슬에서 물러났다.

  처음에는 고양군 인근에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계속 무리들의 비방소리가 들려오자 결국 창평으로 낙향(네 번째)하고 말았다. 그 후 4년 동안 향리인 창평을 근거지로 초야에 지냈다. 이 기간 동안 주옥같은 작품을 지었는데, 이때 수월정(水月亭)에 들려 정기를 지은 것으로 추리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성훈과 박순이 송강을 복권시키고자 했고, 다음해에는 이귀가 상소하여 복권시키고자 애를 썼다. 이때「사미인곡」과「속미인곡」을 지었다.

  또다시 조헌이 상소하고, 이어 기축옥사가 발생함으로 11월에 왕의 특명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어 옥사를 주관하는 위관이 되었으며 낙향한지 4년만의 일이었다.

56세(1591년) 때인 선조 24년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다가 이산해의 배신으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사직서를 올리자 체임(停職)되었다. 이산해는 당초 뜻을 같이 하고자 굳은 약속을 했으나 임금님께서 반대한다는 의중을 파악하고 어전 회의 때 송강의 건의에 반대하고 말았으니 혼자 뒤집어쓰게 된 결과였다.

  3월에 용산촌으로 물러나 왕명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평소에 주색에 빠져 생활이 문란하고, 작당해 무리를 모았으며 조정의 인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혐의로 양사의 논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6월에 양사가 다시 계를 올려 송강의 귀양을 청하자 처음에는 명천(明川)으로 배정되었다가 곧이어 진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지 사흘 만에 번복을 당해 북녘 땅 강계로 유배되었다. 위리안치의 혹독한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독서와 사색으로 세월을 보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초에 유배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임금님을 모시게 된다. 9월에 충청ㆍ호남 양도의 체찰사(體察使)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와 조헌의 죽음 알고 제문을 지었다. 다음  해 1월에 체찰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모함을 받았으나 조정으로 돌아갔다. 5월에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게 되는데 출발에 임하여 임금님께 글을 올려 국난에 대한 간절한 뜻이 함축된 내용이었다.

  귀국직후 명나라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할 뜻이 없는 것이 송강에 의해 거짓보고라는 엉뚱한 모함을 또 다시 받았던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그는 사면을 청하고 강화군 송정촌으로 물러났다. 이때 당장 생계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니 깊은 시름을 안고 지내다가 그해 12월 18일 거처에서 한 많은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이렇듯 동인은 서인의 영수격인 송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틈만 나면 양사를 동원하고 뒤에서 조정해 송강을 꺾고 서인을 말살했다 그의 우국충정과 청빈함을 알고 있던 선조의 비호가 있었으나 그도 한계가 있었다. 그의 재능이 아까우니 귀양을 보낸 후 사면을 시키고 다시 등용한 것이 수차례였다.

  58세 때 세상을 뜬 이듬해인 1594년 2월에 경기도 고양군 신월에 이장했다. 그 후 인조 24년(1624)에 관직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난 후 효종 6년에 충북 진천으로 다시 이장했다. 20년 후인 숙종 10년에 ‘문청(文淸)’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7년 후에 다시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숙종 20년에 재차 회복되었다. 이렇듯 사후에도 영욕이 반복된 그를 아직까지 매도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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