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13> 강항과 수월정
<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13> 강항과 수월정
  • 광양뉴스
  • 승인 2016.04.29 20:04
  • 호수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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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시인·수필가
조동래 시인·수필가

수월정기를 강항(1567.5.17.~ 1618.5.6.)선생 작품이라 제시한 자료(수은 강항선생과 광양 수월정, 학술세미나)에 제시된 내용으로 우선 정설과 수은 강항성생의 인적 관계 및 배경을 연결해 보고자 한다.

정설의 조부는 정표(鄭彪 : 1599~1551)이고 아들 형제(인관·인홍)를 두었으며 설의 아버지는 정인관으로 슬하에 3형제를 두었다. 그리고 삼촌인 정인홍은 화순 능주에 기거했다고 보여 진다. 슬하에 4남(鄭溟·鄭濚·鄭화·鄭澐) 2녀(장녀 : 안사국에게 출가, 차녀는 진주 김씨 金琫과 결혼)를 두었다.

그 중 김봉의 딸은 1588년 22세이던 강항과 결혼했다. 김봉은 사위인 강항과 함께 피란하다가 왜군에 잡혀 일본까지 다녀온 사람이다. 이를 보면 정화는 강항에게 9년 연상의 처숙부(妻叔父) 이고, 정설은 20년 연상의 처당숙이 된다. 정화는 선조 38년에 진사가 되었지만 50세에 세상을 떠나니 그의 만사(輓詞)를 강항선생이 지었다. 

우선 송강집에는 정설의 본관이 광산이라 적혀 있고, 수은집에는 광주라 적혀 있는데, 문중 대표 말에 의하면 족보(30년 마다 새로 만드는 것이 통상적인 예임)를 만들 때 처음에는 광산으로 돼 있었으나 중간에 광주로 했다가 다시 광산으로 고쳤다고 하니 그것은 문제될게 없다.

수월정을 건축한 정설은 강항의 처 외당숙이다. 그래서 쓴 기문에 정설이라는 이름을 적지 않고‘ 公’이라는 존칭어를 구사했던 것이다. 정설은 강항이 일본에서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 수월정 기문(記文)을 부탁했다.

그러하니 답으로 강항선생이 적기를 “내가 비록 공의 정자에 올라가보지는 못했으나 다행히 일찍이 공의 노래를 외웠고 공의 편지를 보아 이미 수월의 대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으며 공의 마음을 내가 본디 알고 있는 바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정자의 아름다음을 노래한 30영의 시를 지어주었다. 

그런데 수월정 기문과 시가 1894년 무렵 발간된 정철의『松江集』에 실려 있다. 수월정의 건립 시기는 정설이 나주 목사를 역임한 후일 것이다. 정철은 그 이전인 1593년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송강집에는 정설의 본관이 광산이라고 적고 있으나 당시 문중에서는 광주라고 쓰고 있을 때이며 최근에 다시 광주로 고쳐 쓰고 있다.

그러므로 송강집 기문은 18~19세기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송강집에는 정설의 이름을 적시하였고 여러 곳에 후(侯:수령이라는 의미)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작자가 타인이기 때문에 이런 작법을 구사하였는데, 친척이라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송강집『수월정기』는『광양읍지』와『광양군지』에 그대로 실리고 말았다.

또한 광주정씨 족보에도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광산’이라는 단어와‘병화십년’이라는 단어가 누락되어 있다. 광산이라는 단어는 본인들이 광주로 칭하였기 때문에 삭제한 것 같고, 병화십년은 정철의 사망시기와 맞지 않기 때문에 삭제 한 것 같다로 제시하고 있다.       

수월정기문은 송강 정철 문집『松江集』에 실려 있다. 한장석(韓章錫, 1832~1894)이 1893년에 쓴 송강집 중간(重刊)서문에 의하면『송강집』은 1633년 무렵에 송강의 막내 정홍명에 의해『송강유고』라는 이름으로 목판본 1권으로 처음 간행했는데, 이것이 원집(元集)에 해당된다.

그 후 우암 송시열이 이어온 연본 2권으로 수정하였고, 외 증손 이선(李選,1632~1692)이 누락된 것을 수집하고 보충하여 속고 1권을 만들었는데, 이때가 1677년 무렵이다. 이것이 속집으로 발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지만 발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속집에 어떤 글이 들어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다가 후손 정재경이 또 빠트린 것을 수습하여 3권으로 늘리고 부록 2권과 아울러 8권으로 편집하였다. 바로 이것을 한 장석이 교정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제시한 자료(수은 강항선생과 광양 수월정, 학술세미나)를 좀 더 알아두어야만 결론을 얻게 되기 때문에 …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