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돈이 남고 안 남고 하는 것이 뭣이 중요하당가?”
“이 나이에 돈이 남고 안 남고 하는 것이 뭣이 중요하당가?”
  • 김영신 기자
  • 승인 2017.07.14 18:46
  • 호수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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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세 정서운 할머니 60년 광양 5일장 야채행상 속‘삶과 베풂’

정서운 할머니를 만나러 간 날은 염천(炎天)에 호흡이 가빠오는‘초복’이었다. 광양읍‘o 아파트’경로당, 정서운 할머니는 그곳에 계셨다.

지난 11일, 광양 5일장을 다녀오신 정 할머니는“오늘 날이 너무 더워 순천장에 안갔다”며 아파트 경로당에서 쉬고 계셨다. 5일장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할머니가 5일장과 인연이 깊어서다.

“서른 살부터 바구니 이고 이 장 저 장 다니면서 장사를 시작했어. 열아홉에 시집을 왔는데 시아버지가 선생님을 하고 계셨어. 옛날 살림이 다 그랬듯이 시집도 재산이라는 것이 없이 어려운 살림 이었지”할머니는 힘들었던 지난 삶을 잠시되돌아 보는듯 했다.

할머니는“밭농사 지어 푸성귀가 조금이라도 나오는 계절에는 5일장에서 노점을 하고 농사철이 지나면 충청도로 어디로 객지를 다니며 이 것 저 것 파는 행상을 하면서 재산을 모아가며 자식들을 공부시켰다”고 했다.

좋은 가문에서 부잣집 아씨로  태어난 정 할머니는 60여 년 동안 광양 5일장에서 야채행상을 했고, 올해 93세가 됐지만 세월의 무게에 청력이 조금 약해졌을 뿐 아직 양파농사를 짓고 소식을 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할머니의 얼굴과 손에 깊게 패인 주름에서 그 동안의 세월이 많이 고단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정 할머니에게 주변 사람들은“이제 그만해도 안돼요?”라고 묻는다.“이제 안하면 좋겠는데 바람도 쐬고 사람도 만나려고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정 할머니가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1남 4녀를 둔 할머니는 자식들의 효심에 행복한 생을 보내던 중 2년 전 가슴에 묻어야 할 큰 아픔을 겪었다. 갑자기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를 위해 서울에서 은행에 다니는 스물아홉 손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한다. 아들과 손자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눈가가 금새 촉촉해진다. 정 할머니는 손자의 그 정성에 감복해 일을 하면서 슬픔을 이겨내고 있다.

아파트 경로당에서 문해교육을 받고 한글을 깨우친 정 할머니는 이제 농협에 가서 출금전표에 이름을 쓰고 직접 돈을 찾을 수 있게 됐다.

5일장에서 팔고 남은 야채는 경로당으로 갖다 주기도 한다. 순천 5일장에 가는 날이면 10여 년 동안 정 할머니의 발이 되어 준 개인택시 기사에게 후하게 요금을 지불하고 그의 아내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생선, 야채 등을 사서 기사에게 전해주며 베푸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이런 정 할머니를 주변에서는‘베푸는 할머니’,‘ 헛된 말도 절대 안하고 누가 잘하나 못하나 뒷말을 하려고 들면 그러지 말아라, 다 잘한다고 해라’며 모범이 되는 할머니라고 칭송한다.

정 할머니에게 광양 5일장의 60년 역사도 듣고 싶었지만 세월의 무게가 덜어 간 청력 탓에 그럴 수 없었음을 아쉬워하며 경로당을 나섰다. 정 할머니의 아픔이 조금씩 아물어가기를 바라며 내내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