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움과 비움-이종태 광양문화원 부원장
채움과 비움-이종태 광양문화원 부원장
  • 광양뉴스
  • 승인 2017.08.25 18:22
  • 호수 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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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시에서 운영하는 노인복지회관에 일주일에 두 번 나가 네 시간 공부를 하고 있다.

어느날 노래연습장에서 나오며 두 분이 나누는 대화에 잠시 생각이 머문다. “시간을 보내기는 노래방이 최고지!” 장수를 희망하고 나름 노력하면서도 그 늘어난 여생을 보다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지 못하고 무료함을 걱정하는 모습이다.

복지회관에 나오는 많은 분들이 등록분야의 공부보다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몇 분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았다. 고령화 시대에‘어떻게 사는 것이 무료를 느끼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며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나이 들어 국문학을 공부하면서 뒤늦게 감명 받은 것 중 하나는 공부가 채우기 위한 공부와 함께 비우기 위한 공부도 있다는 사실과 학문(學文)이 학문(學問)보다 더 우선시 된다는 사실이다. 즉 선대가 남긴 시서(時書;시와 글씨)와 육예 [예(禮;예용; 예절바른 차림새나 태도)·악(樂;음악)·사(射;궁술)·어(御;마술)·서(書;서도)·수(數;수학)]를 배우는 학문(學文)보다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익히되 의문과 탐구를 통해 앎의 영역을 개선하고 쌓아 가는 학문(學問)이 오늘날의 공부개념에 더 가깝다는 뜻이다.

농사를 12년간 배우며 들어본 충고 중 가장 의미 있게 다가오는 말 중 하나는 “고추모를 묶어 줄때는 시간이 더 걸리고 어렵더라도 넘어지지 아니하되, 흔들리게 묶어주어야 잘 자란다”는 한 촌부의 말이었다.

노년의 삶이 무료를 느끼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의 열쇳말을 위의 두 사례에서 찾고자한다.

생명체의 근원인‘움직임’과 발전과 공감의 바탕인‘지적 호기심’에 대한 성찰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단세포 생명에서부터 먼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섭취, 소화, 흡수, 배설이라는 내적 움직임을 시작하였고 바다에서 뭍에 오르고, 고등동물을 거처 현생인류로 진하하며 수렵과 채집, 이동과 정착, 경작과 사육, 경계, 공격과 방어에 이르기까지 삶은 움직임의 그 자체였을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호흡과 맥박 외에도 우리의 몸과 정신 속 DNA에는 손금이나 주름보다 몇 배 많은 움직임의 속성들이 사리(舍利)처럼 박혀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문명이 발전할수록 움직이지 않고 편안함을 행복의 기준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몸이 가지고 있는 움직임의 본능을 일깨우고 이에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조상들은 밀물과 썰물, 초승달과 보름달. 비바람에 의한 깎임과 새로운 퇴적, 새싹의 돋음과 낙엽 짐 등 수많은 자연현상을 격물치지(格物致知) 하면서 이세상의 영속성은 부단한 채움과 비움의 움직임에 있음을 알고 노년에는 비우는 공부를 하며 죽음에 다가섰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삶에 진솔하게 다가갈 때 우리는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여기서 진솔하다 함은 성공적인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건강에 유의하며 오직 나만의 삶을 정직하고 성실하며 착한마음으로 올곧게 살아가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깨끗해 질 때 우리는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한걸음 나가 세상이 아름답고 감칠맛 나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사물이 같지 않음을 인식하고 나아닌 타자에 공감과 배려의 마음을 가질 때이다.

드라마의 다음이야기가 궁금하여 내일과 다음 주가 기다려지고 손주들의 커가는 모습이 대견하여 세월의 흘러감을 마다하지 않음 또한 같은 이치다. 모든 타자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질 때 삶은 지적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차고 무료를 잊게 된다. 산을 뚜벅뚜벅 오르는 것조차도 반복을 하면 솔내음이 새롭게 다가오고, 땀의 소중함이 느껴지며, 작은 성취의 연속에 이르러 가슴이 충만함으로 넘쳐남을 느낀다.

설산에서 흘러내린 깨끗한 물이 고인 맑은 호수는 아름다운 산 그림자를 품는다.

부단히 움직여 썩지 않게 산소를 공급하고 삶이 남긴 부유물을 침전시켜, 맑고 깊은 호수가 되어 솔바람 간지러움 마다하지 않고 아침이면 물먹으러 오는 사슴을 기다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