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에 부쳐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에 부쳐
  • 광양뉴스
  • 승인 2019.05.1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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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노 노무현재단 전남지역위원회 공동대표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신지 10년이 되었다. 5 23일이 다가오면 그날의 비통함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온다. 우리 곁을 떠난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추모의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일반국민은 물론 정치인이 이제 봉하마을을 찾는 일은 흔한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대통령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보다 인간 노무현 때문이 아닐까?

우리 부부는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이 남다르다.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과 1990년대 초부터 노동운동가와 고문변호사로 인연을 맺어왔으며, 대선 출마를 하시면서 정치 여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 한국노총 부산본부 상임부의장으로 있을 때인 2002 3 어느 찾아오셔서 말씀이 부의장 도와줘하셨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가게 되었으니 함께 하자고 하시면서 확고한 정치적인 소신을 말씀하셨다. 어려운 이웃의 삶을 누구보다 알고 세상을 바꿔나갈 사람이라는 확신이 왔다. 이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적극 도왔고, 대선 때는 부산지역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필자의 아내(이미옥, 문재인 대통령 자문의) 5.18 광주항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의과대학교 2학년이던 1982년에 감행한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구속 (1 무기징역) 되었을 때는 변호인으로 참여하셨다.

노무현은 민주주의를 위해,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다. 1981 서슬 퍼런 전두환 독재정권 부림 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이후 노동자의 벗이 되었고, 민주투사가 되었다. 13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하였으나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 위해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 야합을 거부하고 힘든 정치의 길을 걸었다.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2000 총선에서는 당선이 보장된 서울 종로를 떠나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지역주의에 맞섰으나 낙선하였다. 그러나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거듭된 낙선은 많은 국민의 공감을 불러일으켜바보 노무현으로 불렸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노사모 탄생시켰다.

이러한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마침내 2002 대선에서이회창 대세론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서민대통령으로 대통령의 권위도 벗어던졌다.

권력을 독점하기 보다는 분권을 지향하고, 정치인이면서도 정치적이지 않았고, 기존 정치판을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 민주주의 가치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대통령 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지배해온 거대 보수 기득권세력과도 맞서 싸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죽음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마저 노무현을 버리는 길을 선택하였다. 자신의 죽음으로 진보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였다. 자신이 진보의 가치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된다는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추모를 넘어 노무현의 가치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노무현의 가치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유산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떠났지만 노무현 정신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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