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광양촌과 윤동주,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자
[문화칼럼] 광양촌과 윤동주,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자
  • 광양뉴스
  • 승인 2019.08.18 19:57
  • 호수 8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북구(재)나주시 천연염색문화재단 운영국장
허북구(재)나주시 천연염색문화재단 운영국장
허북구(재)나주시 천연염색문화재단 운영국장

 

1936년 초여름. 광양의 20여세대가 일제의 감언이설에 속아 이름도 생소한 중국 길림성(吉林省, 지린성)으로 이주했다. 이어서 두 차례에 걸쳐 각각 20세대도 같은 곳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중국 통화시(通化市, 퉁하시) 류하현(柳河懸, 류허현)이었다.

살기위해 야생동물이 으르렁거리는 곳을 농토로 개간했다. 나무를 베어 기둥을 세우고 나뭇가지로 엮은 벽에 흙을 발라 집을 지었다. 어렵게 개간한 땅에 피땀 흘려 농사를 지었지만 쌀은 일제에 공출로 바쳐야 했다. 벼 대신 수수와 옥수수로 한해 한해를 지냈다.

이들은 고난 속에서도 교육을 중시했다. 일찍이 마을에 학교를 세웠다. 광양촌을 만들고, 지역발전을 이끌었다. 60년 후 이 소식은 광양에 전해졌다.

1997년 5월 1일. 당시 광양시의회 서정복 의장과 2명의 의원은 류하현(柳河懸) 삼원포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에 있는 광양촌(光陽村)을 찾았다.

광양 이민 2세, 3세 등과의 만남이었다. 비록 생면부지의 낯선 사이였지만 친혈육을 만난 것처럼 뜨거운 정을 나눴다.

이어서 8월에 광양시의회 의장 등 14명의 방문단이 광양촌을 방문했다. 광양시의회의 주관으로‘광양촌 동포돕기 추진위원회’도 구성됐다. 광양촌의 방문은 계속 이어졌다. 방문하는 층과 목적도 다양해 졌다. 광양 외의 지역과 기업에서도 광양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광양사람들이 일궈온 광양촌에는 한족 등 타촌 사람들이 들어왔다. 광양촌에서 만든 학교는 1991년에 폐교되었고, 삼원포진의 동명소학교로 합병되었다. 지금은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만 남게 되었다.

류하현은 인구 36만명의 크지 않은 곳으로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는 1912년에 서간도 최초로 설립된 학교이다. 류하현은 한국 초대 부통령 리시영 여섯 형제가 삼원포에 항일 무장단체를 설립했던 곳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곳,‘운남강무당’,‘황포군관학교’ 및 청산리대첩의 군관을 대거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 의미가 남 다른 곳에 있는 광양촌의 청장년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났다. 광양촌은 이제 한국 광양과 혈육의 고리가 끊겨져 가고 있다. 하지만 광양촌을 통해 류하현과 인연을 맺게 된 기업과 단체들, 광양촌지원사업회는 여전히 류하현조선족실험소학교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광양은 의도치 않게 독립활동 발상지의 과거와 현재의 매개 중심에 서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한편, 1940년 4월 정병욱은 윤동주를 처음 만나게 된다. 조선일보에 정병욱의 산문‘뻐꾸기의 전설’을 본 윤동주가 정병욱을 찾은 것이 계기였다. 윤동주는 1917년생, 정병욱은 1922년생이다. 윤동주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북간도(間島, 젠다오)의 용정(룽징) 출생이고, 정병욱은 전남 광양 출생이다.

나이와 출신 지역이 전혀 다름에도 같은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라는 점과 문학이라는 공통점으로 친해졌다.

윤동주는 생전에‘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시집 출간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병욱은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갖게 되었다. 정병욱은 징병에 끌러가기 전에 어머니께 윤동주의 원고 보관을 부탁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광양에 있는 정병욱의 생가 마룻바닥에 원고를 숨겨 두었다. 숨겨둔 원고는 1948년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발행됐다.

윤동주의 유고집을 보관했던 가옥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광양신문사에서는 윤동주 청소년 백일장·사생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어느덧 12회째를 치렀다.

상기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관련성이 없는 것 같지만 광양과 간도(길림성)라는 시공간적 유사성, 항일의 상징성 등 공통점이 많다. 특정 사적조직에서 10년 이상 공을 들이고 있지만 광양시 차원에서 대응 전략 전술, 고민이 미흡하다는 점 또한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길림성과의 특별한 인연과 스토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소극적인 광양시와는 달리 전남도에서는 최근 중국 동북 3성과 우호교류 확대 과정에서 광양촌을 끌어들여 전남과 길림성과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시대 상황은 광양촌을 개척한 광양 사람들의 강인함, 개척정신, 단결성, 지혜로움을 광양의 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따라서 광양에서는 광양촌이 계기가 되어 인연을 맺어온 곳들, 연변윤동주연구회 등 공통분모를 갖는 곳 및 단체와 적극적으로 손잡고, 서로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 드라마틱한 사연과 인연 또한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어 교육, 문화, 경제적 발전에 활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