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마로산성의 숨은 이야기
[기고] 마로산성의 숨은 이야기
  • 광양뉴스
  • 승인 2020.05.15 16:31
  • 호수 86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초여름으로 향하는 늦봄, 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산뜻하다. 참나무가 터널을 만드는 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참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사랑스럽다.

매년 잘리고 잘리는 운명을 타고난 오솔길 옆의 노박덩굴. 새순 주변으로 잠자리가지나방애벌레 20여 마리가 떼로 보인다. 애벌레치고는 고상한 모양새를 가진 측에 드는 녀석이다.

녀석들 사이에 작은 노랑날개무늬가지나방애벌레도 한 마리 끼어 있다.

좀 더 오르면 윤노리나무 한 그루. 설레는 마음으로 꽃과 열매를 기다리며 동정을 미루고 있지만 맞는 것 같다.

희소성이 있는 나무는 아닌데 자생하는 윤노리나무를 본 적이 없어서 느끼는 설렘이다.

덜꿩나무의 탐스러운 하얀 꽃과 하늘거리는 고들빼기의 노란 꽃을 즐기며 산성에 올라 마주하는 여백.

산성 성곽에 앉아 백운산 억불봉을 올려다보고, 광양읍내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색다르다.

그러다 사곡 변전소를 지나는 고압 송전탑과 전선을 마주하면 한참 멍하니 쳐다보다 외면한다.

작년 늦가을 참빗살나무 가지에 알을 낳아 자신의 배에 난 털로 덮고 있는 ‘노랑털알락나방’을 만났다.

오늘 보니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들이 잎을 다 먹어 가지만 앙상하다. 군집 생활하는 애벌레들답다.

옆 참빗살나무로 옮겨갔는지 먹이활동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그런데 정작 애벌레는 몇 마리 안 보인다. 사냥 당한 것인지 번데기를 만들려고 숨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녀석들은 5월이면 가지 밑부분이나 잎 사이에 약간 납작한 갈색의 고치를 만들고 번데기가 되어, 10월에 우화해서 짝을 찾고 알을 낳으면 한살이가 끝난다.

폭군처럼 비치는 애벌레의 입장을 대변하자면, 애벌레에게 엄청난 잎을 바쳐야 하는 나무들은 회복력이 뛰어나 한 달 정도면 다시 잎이 무성해진다. 자연에는 인간이 모르는 그들만의 질서가 존재한다. 곤충의 조상들이 먹이활동을 위한 기주식물을 정할 때 무정하게 자기 입장만 생각하며 아무 나무가 고른 것은 아니다. 탐욕스런 인간보다 낫다.

돌로 만든 성곽에서 자라며 매년 잘리기를 거듭하는‘시무나무’.

가지에 무시무시한 가시를 만들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다. 원래 시무나무의 터전이었으나, 산성 복원과 함께 터전을 뺏기고, 자기 터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시무나무. 사람이나 나무나 이런 억울한 사연이 어디 한둘일까.

그런 시무나무의 억울함을 나라도 알아보고 알은 척 해 준다. 그런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다.

마로산성에는 사람의 이야기만 있지 않다. 산성을 오르는 오솔길에, 산성의 텅 빈 여백에 사람들만 모르는 숨은 이야기들이 많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귀가 없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