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에서 나무를 심는 사람으로
사진작가에서 나무를 심는 사람으로
  • 이수영
  • 승인 2006.10.03 07:17
  • 호수 1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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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심은 나무 커가는 것 보며 행복감”

“광양이 고향인 사람들이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백운산의 크기는 대체 얼마만한 것일까?”
백운산 억불봉을 바라보며 어치계곡으로 오르는 길에 수어댐이 있다. 억불봉이 지긋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수어호, 그 수어호를 감싸고 있는 마을이 진상면 비촌마을이다.
비촌마을에 사는 황상보씨……,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우리 광양인들이 가슴에 품고 사는 백운산의 모습은 얼마나 큰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
억불봉 자락에 21만평 임장 가꾸는 사람
황상보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풀씨’라는 인터넷 쇼핑몰(www.poolsee.net )을 통해서였다. ‘풀씨 넷’은 광양에서 생산되는 온갖 자연 농․임산물을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전문 쇼핑몰이다. 인터넷 사이트지만 풀씨 넷에는 백운산 천연자연의 냄새가 폴폴 묻어난다. 백운산 천연자연의 냄새를 온전히 인터넷 망에 퍼 올려놓는 역할을 하는 풀씨 넷! 풀씨 넷을 운영하는 사람이 바로 올해 나이 쉰둘의 황상보씨다. 황씨는 이른바 귀향인이자 귀농인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농민이 아니라 나무를 심는 사람, 그가 가꾸는 산을 농장(農場)이 아니라 임장(林場)으로 불러주길 원한다. 산을 가꾸는 임업도 엄연한 산업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그의 이 독특한 주장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삶이 그의 주장에 긍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농장(農場)이 아니라 임장(林場)
그는 어디에 내놔도 알아줄만한 사진전문가였다. 물론 지금도 그는 사진기를 들고 산다. 그러나 예전에는 상업사진을 찍었다면 지금은 자연만을 담는 것으로 바뀌었다. 비촌마을에서 자란 그는 진상중과 순천매산고를 나와 중앙대 사진학과에 진학했다.

“사진관 하나 차리면 밥벌이는 안 되겠냐”는 74년 당시 부친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졸업과 함께 그는 쥬리아화장품 홍보실에 사진담당으로 입사했다. 회사의 홍보물에 실을 화장품과 모델사진, 또한 사보나 사외보에 실을 여행사진을 찍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86년에는 조선일보사 출판사진부 사진기자가 됐다. 당시 유명했던 사람들 치고 그의 카메라 셔터를 받지 않은 이가 없다. 조선일보에서 그의 주 역할은 자매지인 「월간 산」에 실릴 산 사진을 찍는 거였다. 이 때 그는 인도와 네팔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여러 차례 인도와 네팔에 머물렀던 시간을 합하면 1년이 넘는다. 지금도 그가 가장 아끼는 사진은 그 때 찍은 인도와 네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88년부터 그는 충무로에 스튜디오를 차려 독립한 뒤 상업광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주로 웨딩전문잡지에 실리는 웨딩드레스 사진이나 여행전문잡지에 실리는 유명 리조트 사진촬영 주문을 소화해냈다. 92년에는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맨발의 땅」이라는 주제로 인도와 네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개인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알아주던 사진작가 황상보
전문사진작가로서 잘 나가던 그는 95년 갑자기 귀향을 결심하고 이를 단행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마흔 둘 나이였던 해였다. 빡빡하게만 돌아가는 도시생활을 답답해하던 차에 “정 그러면 고향에 가서 나무나 심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던진 아내의 한마디가 번쩍 귀에 들어오더라는 것이 그가 귀향결정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한 설명의 전부이다. 선조들이 자신을 고향으로 불러들였다고 설명하는 길밖에 없다고 한다.
 
86년에는 조선일보사 출판사진부 사진기자가 됐다. 당시 유명했던 사람들 치고 그의 카메라 셔터를 받지 않은 이가 없다. 조선일보에서 그의 주 역할은 자매지인 「월간 산」에 실릴 산 사진을 찍는 거였다. 이 때 그는 인도와 네팔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여러 차례 인도와 네팔에 머물렀던 시간을 합하면 1년이 넘는다. 지금도 그가 가장 아끼는 사진은 그 때 찍은 인도와 네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88년부터 그는 충무로에 스튜디오를 차려 독립한 뒤 상업광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주로 웨딩전문잡지에 실리는 웨딩드레스 사진이나 여행전문잡지에 실리는 유명 리조트 사진촬영 주문을 소화해냈다. 92년에는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맨발의 땅」이라는 주제로 인도와 네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개인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알아주던 사진작가 황상보
전문사진작가로서 잘 나가던 그는 95년 갑자기 귀향을 결심하고 이를 단행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마흔 둘 나이였던 해였다. 빡빡하게만 돌아가는 도시생활을 답답해하던 차에 “정 그러면 고향에 가서 나무나 심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던진 아내의 한마디가 번쩍 귀에 들어오더라는 것이 그가 귀향결정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한 설명의 전부이다. 선조들이 자신을 고향으로 불러들였다고 설명하는 길밖에 없다고 한다.
장손에 장남인 그에게는 억불봉 자락에 선산 21만평이 있었다. 가족들을 서울에 남겨두고 고향의 부모 곁으로 돌아온 그는 부친이 물려준 산에 아내의 말대로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선택한 수종은 고로쇠나무였다. 그가 낸 조그만 작업로를 따라 올라가면 양편에 간격을 두고 줄지어 몇 겹으로 심겨진 고로쇠나무를 볼 수 있다. 10년 전 어렸던 고로쇠나무는 황씨를 만난 덕에 무럭무럭 자라 지금은 제법 굵은 몸통을 세우고 있다. 이 고로쇠나무들은 5년 쯤 뒤부터는 주인 황씨를 위해 매년 이른 봄이면 달디 단 수액들을 뿜어낼 것이다.
백운산자락의 등성이와 골은 상당히 가파른 지형이다. 신황마을 샛길을 통해 오르는 황씨의 임장은 부친이 30년 전에 심었던 밤나무와 감나무 숲이 있는데다 전체적으로는 가파르면서도 편편한 곳도 많아 나무를 심고 가꾸기에 참 좋았다. 그는 이곳을 ‘이산에임장’이라고 명명했다.
‘이산에임장’ ‘이산에 닷 컴’
조금 더 올라가니 숲 속으로 한 발 들여다 놓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참나무를 얽어  세운 자연 그대로의 표고버섯 재배장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이 때가 표고버섯을 따는 시기이다. 아직 수확량이 많지 않아 그는 이 천연의 표고버섯을 그를 알고 찾는 지인들에게만 공급한다.

황씨의 임장 정상부에는 몇 년 전에 심은 헛개나무와 마가목이 넓은 면적에 걸쳐 자라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면 황씨는 이들 헛개나무와 마가목 또한 약재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황씨는 이곳 임장에서 나오는 자연 그대로의 고사리, 더덕, 칡 등 각종 산채는 물론이고 잘게 썰어 포장한 헛개나무, 마가목 등 약재, 그리고 이곳의 자연 그대로의 감잎과 뽕잎을 따서 만든 차를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쇼핑몰 풀씨 넷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이들 상품에 그는 자신의 임장 이름인 ‘이산에'를 브랜드로 붙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그가 ‘이산에임장’을 가꾸는데 투자한 돈만해도 3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돈이 있고 없음에 붙들려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도 백운산 자연의 일부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자 철학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어떠한 일도 그는 거부한다. 자연이 생산하는 자연 그대로의 ‘무엇’을 추구한다. 빛깔이 좋고 알맹이를 굵게 만들기 위해  뿌리는 농약 농사를 그는 거부한다. 그렇다고 그가 어떤 고상한 산사람이나 산에 묻혀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힘든 도시생활을 하면서 항상 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를 불렀던 백운산 품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수발하면서 자연과 함께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지금이 행복할 뿐이다. 백운산 자연이 생산하는 좋은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것이 그의 유일한 소원이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그가 원하는 삶이다. 그러다보면 온라인에서 만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얻을 것이요, 그 믿음이야말로 경제성 없는 백운산의 자연생산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일 것이요, 백운산에서 감이며 밤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오래도록 먹여 살릴 수 있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왜 고로쇠나무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시중에 나온 ‘2%’라는 음료를 생각해보라고 대답했다. 고로쇠수액이 바로 천연 2% 음료라는 것이다.

최근 산림청 산하 산림과학기술원이 실온에서 1년 이상 고로쇠수액을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덧붙이면서 고로쇠수액으로 충분히 천연 2% 음료를 개발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야 그가 나무를 심고 임장을 가꾸는 이유가 확연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경제성 없는 백운산의 자연을 경제성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게 내 역할이라는 그의 말도 무슨 의미인지 명확히 짚을 수 있었다.
천연 2% 음료 고로쇠수액
 
“사진기자로 일할 때나 스튜디오를 꾸려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내가 찍은 사진이 과연 데스크나 기획사의 마음에 쏙 들 것인가, 일을 하면서 결과물에 대해 걱정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술을 퍼 마시게 되고 스튜디오에서 뻗어서 자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들어 있는 백운산이 아련히 떠오르는 겁니다.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지요.” 
“심은 나무들이 조금씩 커 가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 나무들을 보면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내게 지금보다 행복한 때는 없을 것입니다. 자연에게 ‘감사 합니다’라고 말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백운산의 자연을 틈틈이 사진으로 기록할 수도 있어 너무 좋습니다. 제 홈페이지 ‘이산에 닷 컴’(www.esane.com)에 오시면 제가 찍은 사진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가게 때문에 서울에 사는 아내도 지금은 매우 좋아합니다. 자식을 옆에 둔 부모님도 좋아하긴 마찬가지지요.”
 
“여기 사람들은 배운 사람이 서울서 편하게 먹고 살지 뭐하려 사서 고생을 하냐고 하고, 사진기를 들고 며칠간 도회지로 나갔다오는 저를 보고 후배들은 철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 골짜기에 찾아와서 며칠간 쉬다가 가고 싶어 하는 곳, 좋은 임산물을 사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저의 생각을 마을 사람들이 아직은 인정 안 하기 때문이지요.”

세상에 알려야 할 천연자연 백운산
프랑스 작가 장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지팡이를 들고 하루 종일 산을 쏘다니는 산사람이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죽은 한 참 후에야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게 된다. 그가 쏘다녔던 산에는 지금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자라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 북부 프로방스 지방의 사람들은 그 숲이 주는 맑은 공기와 물, 그늘의 혜택을 맘껏 누리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가 들고 다녔던 지팡이가 그가 밤새도록 실한 놈들만 골라 낸 도토리들을 심는 구멍을 내는 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황상보씨에게 이 소설을 읽어보았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의 홈페이지 ‘이산에 닷 컴’에 그는 스스로 ‘나무 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백운산 임산물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지팡이를 들고 산을 쏘다니는 사람……,  황씨를 만나고 나서 장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을 나는 다시 읽게 됐다.

 
입력 : 2005년 11월 07일 22:1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