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마지막 유배지는 ‘광양’
고산 윤선도 마지막 유배지는 ‘광양’
  • 이수영
  • 승인 2006.11.09 00:52
  • 호수 1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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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룡에서 2년 1개월 유배후 해배 관광자원 충분…유허지 만들어야
우리지역 문화를 찾아서<3>

 
높은 학문·올곧은 성품

자연을 벗삼은 진정한 선비

 
고산 윤선도의 마지막 유배지가 광양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고산 윤선도 하면 모두들 ‘보길도’를 연상한다.

그러나 보길도는 그가 광양 백운산자락 옥룡동(추동)에서 2년 1개원을 유배하다 81세때인 1667년 현종 8년 정미년 7월21일, 길고 긴 16년의 귀양살이에서 해배된 이후 그 스스로 찾아간 ‘은거지(隱居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산 윤선도는 정철 송강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을 써서 자연을 노래한 시인이다.
 
특히 우리 국문학사를 빛낸 ‘어부사시사’를 지은 윤선도는 왕자들을 교육시키는 스승으로서 학문이 매우 깊었다. 그러나 바른말 잘하고 세상과 타협하 않는 옥곧은 성품 때문에 벼슬길 8년에 귀양살이를 16년이나 할 정도로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고산 윤선도가 우리지역 옥룡을 찾은 것은 79세 때인 1665년 현종 6년 을사년 6월이었다. 함경도 삼수에서 광양으로 유배 온 고산은 80세인 1666년 현종 7년 병오년 7월에 금산군 성윤의 신도비명을 짓고 판관 조실구의 묘갈명과 봉사 백홍제의의 묘갈명을 각각 지었다.

또한 광양에서 시 4수를 남겼는데 ‘경화정겸재정안(敬和呈謙齋靜案), 만나경주(挽羅慶州), 만하의흥(挽河義興), 차이사간연지운(次李司諫延之韻)이다. 이중 2수를 소개한다.
 
차이사간연지운(次李司諫延之韻)
 
   (時來或發危言易 : 시래혹발위언역)
      때가 오면 혹 바른말 쉽게도 하지만
   (勢去人能忘世稀 : 세거인능망세희)
      세력이 떠났을 적에 능히 세상 잊는 이는 드물도다
   (枕주自然安夕寢 : 침주자연안석침)
      팔꿈치 베니 자연히 저녁잠 편안하고
   (念書猶未悟朝飢 : 염서유미오조기)
       책 읽으니 오히려 아침 시장기도 모르겠도다
   (초료方笑鵬遐擧 : 초료방소붕하거)
       뱁새는 바야흐로 붕새의 높이 오름 비웃는다만
   (挑李何知桂晩菲 : 도이하지계만비)
       도리화야 어찌 알리 계수나무 늦게까지 향내가 남을
   (悠悠萬事任天機 : 유유만사임천기)
       유유히 만사를 천기에 맡기노라
 
경화정겸재정안(敬和呈謙齋靜案)
 
(脈脈過桐雨 : 맥맥과동우)
      끊임없이 오동나무 스쳐가는 비
(悠悠近麥波 : 유유근맥파)
      한없이 다가오는 보리 물결
 (何嫌公敎切 : 하혐공교절)
      어찌 혐의하랴 그대의 가르침 통절함을
 (曾受吏詞多 : 증수이사다)
      아전들 꾸지람도 무수히 들어야 하거늘
 (萬事都遺落 : 만사도유락) 
     온갖 일 모두 다 내버려 두고 
 (惟知鼓缶歌 : 유지고부가) 
     오직 아노니 고부가로다
 
 
 
고산 윤선도 ‘유허지’ 관광 자원해야
 
그러나 정작 광양에는 윤선도의 마지막 유배지라고 표시된 ‘유허지’나 시비(詩碑)하나 없는게 현실이다.
 
고산 윤선도가 옥룡면 추동마을 504번지 일원에서 유배한 장소라는 것은 문헌에 나와있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추동마을이 적소였다는 것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

이곳에에 사는 유봉심(80)할머니는 지난 1913년 9월부터 1915년 12월까지 2대 옥룡면장을 지냈던 고 김시봉(1863~1941) 면장의 손자 며느리로 어렸을때 김시봉 면장으로부터 우리집 장독대 있는데가 바로 고산 윤선도가 유배한 장소라고 누누이 귀가 닳도록 들었다는 것이다.

추동마을은 백운산 자락의 옥룡사지 인근 마을로 고산 윤선도가 머물렀다는 가래골은 야트막한 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옆 대나무 숲에는 고산이 지은 ‘오우가’를 흡사 연상케 하는 장소가 아름답게 원시상태로 자리하고 있어 관광자원화 하기에 적소라고 여겨진다.

이곳 대나무(竹) 숲에는 양쪽 대밭 사이로 계곡이 자리해 물(水)이 자연스레 흐르고, 그 물 흐르는 가장자리에 큰 돌(石)이 자리하고 있으니 이곳에 둘러 앉자 달(月)을 벗삼아 시 한수 지을 수 있으니 천혜의 자리다. <오른쪽 사진 참조>

따라서 광양시는 이 곳을 적려유허지로 복원을 시켜도 손색이 없을 듯한데, 본지가 지난해 지적했듯이 광양시에는 우리지역 문화재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복원할 수 있는 학예연구사 1명 없는 것이 광양시의 현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오 우 가
[서사]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다.
게다가 동쪽 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구나.
그만 두자, 이 다섯 가지면 그만이지 이 밖에 다른 것이 더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水]
구름의 빛깔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가 맑게 들려 좋기는 하나, 그칠 때가 많도다.

깨끗하고도 끊어질 적이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石]
꽃은 무슨 까닭에 피자마자 곧 져 버리고,
풀은 또 어찌하여 푸르러지자 곧 누른 빛을 띠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松]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날씨가 추우면 나무의 잎은 떨어지는데,
소나무여, 너는 어찌하여 눈이 오나 서리가 내리나 변함이 없는가?

그것으로 미루어 깊은 땅 속까지 뿌리가 곧게 뻗쳐 있음을 알겠노라.
 
 
 
 
 
 
 
[竹]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라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또 속은 어이하여 비어 있는가?
저리하고도 네 계절에 늘 푸르니, 나는 그것을 좋아하노라.
 

[月]
작은 것이 높이 떠서 온 세상을 다 바추니
한밤중에 광명이 너보다 더한 것이 또 있겠느냐?(없다)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나의 벗인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