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가, 독립을 외치는 그날의 만세소리
들리는가, 독립을 외치는 그날의 만세소리
  • 최인철
  • 승인 2009.06.18 10:12
  • 호수 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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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광양읍 5일장을 중심으로 민족독립 외쳐

우리지역 독립유공자는 3.1운동 관련 유공자들이 단연 많다. 28명 가운데 10명에 이른다. 우리지역 3.1운동은 주로 서울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발생한 지 한 달여 지난 시기에 광양읍 오일장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후 장날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각 지역별 만세운동 움직임도 잇따랐다. 이들 대부분은 태극기를 제작해 군중을 선동, 만세운동 주도한 혐의로 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학생운동 관련 유공자는 다른  유공자에 비해 그 수가 적다. 그러나 1923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을 이끄는 등 일본과 광주 등지의 학생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편집자 주-가나다순>

▲김상후(1870. 5. 10~1944. 9. 22)
1919년 4월 1일 광양읍 장날을 이용, 김석용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음식점에서 30여명의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의 당위성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그해 4월 26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김석용(1894. 2. 11~1955. 4. 12)
1919년 4월 1일 광양읍에서 장날을 이용, 김상후 등과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써서 곳곳에 붙이는 한편 주민들을 규합해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됐다. 그해 5월 10일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김영호(1904. 4. 23~)
1919년 3월 27일 광양군 인덕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이어 3월 29일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장날을 이용,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한 후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와 태극기를 만들고 다수 군중을 모으는 격문을 작성, 각 마을마다 붙이도록 해 거사의 취지를 널리 전파하려다 일군 헌병에게 발각돼 체포됐다. 그해 5월 10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박용래(1890. 12. 25-1951. 2. 6)
1919년 4월 4일 인덕면에서 장날을 이용, 천여 명의 시위 군중을 규합,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그해 4월 26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박용수(1901. 12. 14-1985. 2. 4)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 29일 동지들과 함께 장날을 이용, 만세운동을 결의, 시위 군중을 규합하기 위한 격문을 각 마을마다 붙이다 일군 헌병에게 발각됐다. 그해 5월 10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서경식(1886.4.8-1938. 2. 21)
1919년 4월 4일 동지와 함께 장날을 이용, 읍내리에서 천여명의 시위군중을 규합,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됐다. 그해 4월 26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임태일(1899. 9. 9-1959. 11. 5)
1919년 4월 15일 진월면 송금리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 서당 학생들과 같이 태극기를 제작하며 주민들에게 통문을 보내는 등, 준비를 갖추고 이날 진월면 선소리 무적도에서 시회를 가장,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려다가 일군헌병에 체포됐다. 이해 5월 8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정귀인(1895. 1.12-1946 3.29)
1919년 4월 1일 서경식, 박용래 등과  장날을 이용,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만들고 태극기를 준비,  읍내리(邑內里)에서 만세운동을벌이다가 체포됐다. 이해 4월 26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정성련(1919. 41세-1923 3. 14)
1919년 3월 27일 광양읍 장날에 단독으로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계획, 태극기 3매를 만들어 거사일인 장날 장터로 나가 수백명의 장꾼 앞에서 태극기를 장대에 메어 머리 위에 높이 들고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됐다. 같은 해 4월 26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진신애(1900. 7.3-1930. 2. 23)
1919년 당시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 살면서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 이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미 2·8독립선언서가 광주지방의 청년들에게 전달됐고 광무황제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던 김철과 서울 유학생 최정두 등이 1919년 3월 5일 광주로 돌아오면서부터 곧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이 세웠다.
그는 3월 10일 여학생들을 이끌고 광주장터로 나아가서 모여든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이처럼 선두에 서서 학생들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체포됐다. 그해 4월 30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상환(1909. 3. 28~1977. 12. 16)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학생결사 성진회를 조직한 후 그 주동 학생으로 활동했다.
또 1929년 당시 그는 광주고보생 20여명과 함께 무등산에서 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으로 광주고보독서회를 조직, 대표 겸 조직교양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된 그는 주동자로 지목, 1930년 10월 체포돼 학생 중 최고형인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다가 항소,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채룡(1921. 6. 6-)
1941년 3월 광양광업소에 근무하다 비밀결사 백의회를 조직, 동지규합에 힘썼다.
1941년 8월 일본 경도 기독교청년회의 야간 중학부에 진학한 뒤 10여 명의 동지를 규합, 국내 동지들과 서신을 교환하다 1941년말 경도 굴천경찰서에 체포됐다.
1942년 11월 2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장세영(1922. 6. 18)
일본 동경 소재 일본대학 예술부에 재학 중이던 1943년 2월 동지들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소련과 개전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재미 독립운동가 및 재일 한국인 학생들과 연계, 일제히 봉기,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
자금모집을 위해 그는 동경 거주 외국인들과 교섭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됐다. 1944년 8월 1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