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죽음, 국가가 명예 회복 적극 나서야”
“억울한 죽음, 국가가 명예 회복 적극 나서야”
  • 최인철
  • 승인 2009.07.01 22:52
  • 호수 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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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그 뒤에 숨겨진 민간인 학살규명

과거사위, 올해 여순사건 등 광양지역 민간인 희생자 사건조사

광양읍 세풍리 세승마을 허정태(62)씨. 그는 기자 앞에서 한동안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그의 눈빛을 타고 지나가는 듯 했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2명의 숙부에게 덧씌여진 죄목은 ‘좌익분자’. 그것은 그들 가족에게 지난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항상 무거운 멍에이자 지울 수 없는 화인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59년이 흘렀다. 억울했지만 침묵하고 살아온 시간들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6.25전쟁기념일은 그들 가족에게 ‘피를 토하고 죽고 싶을 만큼 억울한 날’의 다른 이름인지도 몰랐다.

 

재판 없이 즉결 처형, 한꺼번에 4명 학살

 

그의 숙부인 허장오(당시 31)와 옥선(당시 21)씨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51년 11월 13일 살해됐다. 이들 형제가 좌익활동이 의심된다며 한 주민이 경찰에 신고했고, 신고를 받고 온 경찰들은 조사를 하겠다며 끌고 가던 중 마을 뒷산 고갯길인 ‘무선쟁이’에서 사살했다. 별다른 조사나 재판 없이 자행된 학살이었다. 당시 경찰이나 토벌대는 이처럼 민간인을 사살한 뒤 공비를 사살했다며 태연히 전공(戰功)으로 기록하던 시절이다. 이날 학살로 허 씨 가문은 4형제 가운데 2형제를 잃었다.

허 씨는 지난 2006년 11월,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 민간인희생자규명위원회에 숙부인 정오, 옥선 형제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지나 버린 세월이었지만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와 신원이라도 회복할 수 있었으면 하는 심정에서였다. 과거사위는 1년 반 남짓 지난 지난해 6월 24일 이들 형제의 죽음을 민간인희생사건으로 결정했다. 억울한 죽음의 실체가 59년 만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정오, 옥선의 죽음은 국가권력이 저지른 학살이었다. 이는 과거사위가 조사보고서를 통해 이번 사건의 가해자는 관할경찰서장의 지휘와 명령, 감독 아래 부역혐의자 색출활동과 빨치산 토벌작전을 한 경찰과 경찰 토벌대라고 규정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과거사위는 장오 옥선 형제가 광양읍 무선쟁이(세승마을-덕례리 무선마을 사이 고갯길)에서 광양경찰에 의해 사살된 사건으로 규정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형제는 일제식민시절 일본에서 공부하던 중 해방을 맞아 귀국한 뒤 형 장오는 주물공장에서, 동생 옥선은 광양서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하지만 형제는 인민군 점령기 피난을 가지 못한 채 고향집에 살았다. 어느 날 동생 형제의 집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다녀갔는데 이를 빌미 삼아 국군이 마을을 수복한 뒤 마을주민이 이들 형제를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과 어울렸다고 경찰에 밀고했다.

 

희생자 유가족, 그 삶의 신산스러움

 

11월 13일 경찰관 5명이 마을로 와 허 씨 형제와 같은 마을에 살던 배도열 씨,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자 등 4명을 조사할 것이 있다며 경찰서에 연행돼 끌려가다 무선쟁이에서 4명 모두를 사살했다.

무선쟁이에서는 이들 말고 좌익활동이나 부역의심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는 장오 옥선형제 조사과정에서도 잘 드러났다. 조사에 참고인으로 나온 당시 광양경찰서 토벌대원 장 아무개 씨와 안 아무개 씨는 “대원들이 무선쟁이 고개에서 여러 번에 걸쳐 사람들을 사살했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네 살배기 어린 아이였던 허 씨는 “장오 숙부는 사살 당시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둔 아버지였고, 옥선 숙부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며 “숙부들의 죽음 이후 할머니도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한을 품은 채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순간 허 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특히 “서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옥선은 주변에서 천재라고 불릴 만큼 머리가 비상했다는 것을 당숙 등 친지들을 통해 들었다. 다들 모진 세상이 아까운 목숨을 앗아 갔다고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살된 뒤에도 가족들은 경찰의 보복이 무서워 시신을 수습조차 못하다가 죽임을 당한 지 3일이 지나서야 장례를 치룰 수 있었다”며 “하지만 그 분들은 아무런 죄 없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이라고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허 씨는 “이후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았다. 자라면서 마을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끼면서 죄인처럼 살았다”며 “연좌제에 묶여 취업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 좌익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산 지난날의 신산스러움이 묻어났다.

여전히 숙부형제를 밀고한 사람들의 후손들과 살아가고 있는 남겨진 가족들의 삶은 차라리 지독한 형벌이 아니었을까. 허 씨는 “아직도 이웃들과 갈등이 생기면 빨갱이 가족이라는 말을 간혹 듣는다”며 “50여 년 세월을 들어왔지만 그 말을 들을 때면 여전히 가슴이 많이 아프고 속상하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철저한 진상규명-화해의 장 여는 첫 길목

 

하지만 그에게 분노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여전히 우리사회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도 신고조차 못 하는 피해가족들이 있는 만큼 당국의 철저한 진상규명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과 “억울하게 돌아가신 두 숙부의 명예를 국가가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더나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화해의 장이 마련되는 일”이다.

과거사위는 “전시 수복 과정의 극히 혼란한 상황에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군경이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 절차에 따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과거사위는 이번 사건에 대해 희생자 유족과 국민에게 공식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또 이들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사업 추진과 군경과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인권교육 실시도 함께 권고했다.

한편 우리지역에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로 결정된 이들은 허 씨 형제, 옥곡면 묵백리 정태용(당시 42)씨와 그의 아들 정석기(당시 24)씨 등 4명이다. 그러나 과거사위가 올해 10월까지 우리지역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규명사업을 집중 전개할 예정이어서 민간인 희생자 발굴작업은 물론 역사적 실체 규명도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