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사랑한 나의 아버지 정귀인”
“나라를 사랑한 나의 아버지 정귀인”
  • 최인철
  • 승인 2010.02.25 09:52
  • 호수 3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립유공자 가족 정용호 옹

3·1절을 앞두고 가슴이 울컥해지는 사람이 있다. 순천시 풍덕동에 사는 정용호(84)옹도 바로 그런 이다. 그의 아버지는 1885년 옥룡면 죽천리 죽림마을에서 태어나 해방직후인 1946년에 유명을 달리한 정귀인이다. 정 옹도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정귀인은 3·1운동이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뒤 만세운동이 전국각지로 확산되며 광양읍5일장이 서던 4월 1일 서경식(당시 34), 박용래(당시 46) 등과 함께 광양지역 3·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날 정귀인이 “대한독립만세”를 선두에 서서 외치자 광양장에 운집한 군민 1천여 명이 일제히 몰려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광양장은 삽시간에 만세의 함성으로 들끓었다.

이날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정귀인과 서경식, 박용래는 일본 헌병대에 결국 체포 연행됐다. 정귀인은 연행 도중에도 일본의 조선침탈과 탄압의 부당성을 규탄하며 독립만세를 끊이지 않고 외쳤다. 정귀인 등은 헌병대 조사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했고 재판과정에서도 초지일관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그에 상응하는 핍박 또한 가혹했다.

이들은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 그는 일본에 협조를 거부하다 광복을 맞았으나 1946년 3월 29일 6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런 아버지였다.

정용호 옹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일제치하에서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며 학교에도 보내지 않던 사람이다. 또한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나라사랑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이였다. 정 옹은 “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동네사람들도 일제치하라 눈치를 많이 받아야 했다”며 “특히 독립운동 관련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만류한 탓도 있지만 학교도 못갈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고 말했다.

부친이 죽고 세월이 흘렀다. 3·1운동도 잊혀졌다. 아버지 정귀인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무엇보다 정귀인의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남아 있을 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자 정 옹은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다. 징역까지 살았다는데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아버지 재판기록을 찾는 일이었다. 수십년이 흘렀고 특히 일제시대 재판기록을 찾는 일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당시 재판이 진행됐던 순천지원에서 근거를 찾았으나 남아 있지 않았다.

재판문서를 찾아 정 옹은 부산국사기록관과 서울중앙도서관 등 기록이 남아 있을 만한 모든 곳을 틈이 나는 대로 찾았다. 보훈처에서 ‘그만하라’는 마지막 통보를 받았을 때 그에게 불어닥친 실망감도 컸다.

그렇게 10년 동안 실망만을 떠안은 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 옹은 1992년 동아일보에 난 대통령 표창자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아버지 정귀인의 이름 석자가 그곳에 적혀 있었다.

결국 아버지 정귀인은 2001년 7월 독립유공자 증서를 받았다. 국가가 아버지의 독립유공을 인정한 것이다. 정 옹은 “평생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평생 직장이던 교단을 내려온 뒤 그는 3·1운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를 위해 3·1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으는 일을 놓지 않고 있다. 특히 광양지역 만세운동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한 권의 책도 발간했다.   

정 옹은 “아무 것도 남겨지는 게 없어 스스로 뭔가를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에 책을 만들었다”며 “나라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과 3·1운동의 정신을 길이 잊지 말라는 아버지의 뜻을 후손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서 그리움이 가득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