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수습책을 제시하다
매천,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수습책을 제시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3.25 09:32
  • 호수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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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12)

지식인은 세상을 향해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된다고 자신을 강제하고, 스스로에게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라는 지상 명령을 내린다. 뿐만 아니라 현실의 당면 과제를 넘어서 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야 함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지식인의 매천식 표현은 ‘식자인(識字人)’이다. 누구보다도 ‘글 아는 사람’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무겁게 느꼈던 매천은 세상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동비’들의 난을 진압하고,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을 고민하였다.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를 공격한 후에
남에게 공격당한다

민중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외세, 즉 청 ? 일 양군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두 나라 군대 중에서도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이 조선 정부와 전주에서 화의의 약속을 하고 자진 해산한 후에도 철수하지 않고, 경복궁을 점령하며 우리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바로 청일전쟁이다. 그리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며 일본공사를 통해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우리 정부에 ‘5강 16조’를 보내어 국가의 기강을 개혁하도록 권하였다. -중략- 이 여러 조항들을 살펴보면, 반드시 우리를 진정으로 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대증요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힘써 시행했더라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화가 있었겠는가? 경전에 이르기를,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를 공격한 후에 남에게 공격당한다.(國必自伐而後 人伐之)”고 하였으니, 아 슬프다!
매천은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제시한 개혁안이 조선의 개혁을 위한 근본방안은 아니지만 임시방편은 된다고 인정하고 있다.『맹자』에 나오는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를 공격한 후에 남에게 공격당한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개혁방안을 마련하지 못하여 변란이 일어났음을 슬퍼하고 있다. 시쳇말로 쿨하게 모든 것이 우리 탓임을 인정하고 있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수습책을 제시하다

매천은 동학농민군의 봉기라는 역사적 소용돌이를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난후 수습을 위한「갑오평비책」을 집필하였다. 그의 보수적 전통 사상이 잘 담겨 있는 수습책으로서 전10조목 1,728자에 달하는 문장으로 되어 있다. 먼저 그 서론을 보면, 오늘날 호남의 형세는 사람이 급체 후 막 토사를 한 상황과 같다. 비록 잠시 멈춘 것 같으나 뱃속이 오히려 뒤틀려서 반드시 한번 창자 속을 씻어낸 후, 천천히 죽과 미음으로 조리해야한다. 만약 갑자기 기름진 쌀밥과 고기를 먹는다면 죽음을 재촉할 따름이다.

황현은 동학농민운동 직후, 운동의 중심이었던 호남 지역의 상황을 체한 뒤에 토사를 잠시 멈춘 상황에 비유하고, 근본적이고 강경한 대응으로 근본적인 치유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매천은 동학농민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엄한 처벌과 이를 수습하기 위한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각 조항의 핵심을 살펴보면,
1조, 난의 원인을 찾아서 흥분을 가라앉히소서. 2조, 지방관들이 성을 버린 죄를 왕법으로 밝히소서. 3조, 절의를 숭상하고 권장하여 윤리와 강령을 부양하소서. 4조, 공과 죄를 확실하게 정해서 선비의 마음을 고무하소서. 5조, 이번 사건의 원인을 캐내서 난리의 싹을 끊어소서. 6조, 징계를 엄히 하여 민심을 안정시키소서. 7조, 세금과 부역을 감면해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살리소서. 8조, 서리의 폐단을 제거하여 해충 같은 도적을 멸하소서. 9조, 지방의 장정으로 병제를 새롭게 하소서. 10조, 향약을 반포하여 풍속을 후하게 하소서.

1, 2, 4, 5, 6조항은 처벌책이다. 매천은 난을 유발시킨 고부군수 조병갑과 같은 탐관오리들을 과감히 숙청하고, 난의 진압에 공을 세운 양반과 백성들에게는 충분한 포상을 주장하였다. 또한 동학농민운동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을 엄히 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리석은 백성이 잠시 적을 따른 것은 용서하더라도 적극 가담자들은 ‘풀을 베듯, 짐승을 사냥하듯’ 극형에 처해 난리의 싹을 잘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극형으로 줄어드는 인구가 1도(道)에 1만 인에 이르더라도 법을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기존의 권위와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동학농민군을 매천의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매천은 엄한 처벌책과 동시에 3, 7, 8, 9, 10 조항에서 수습책도 제시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유교적 민본주의에 입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의 봉건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체제내의 개혁, 즉 세금의 탕감, 병제의 개편, 풍속의 교화 등 유교 윤리 강령의 진작을 통해 백성들의 불만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특히, 매천이 제시한 마지막 10항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실현가능성도 낮은 재야 지식인의 유교적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매천은 현실적으로는 힘없는 향촌의 양반일 뿐이었다.

매천, 유교적 지식인의 한계를 드러내다

동학농민운동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결정적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크고 조직적인 민중들의 저항이었다. 농민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 이 시대의 당면 과제였던 토지 제도와 신분 제도 등의 봉건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이라는 제국주의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매천은 이 역사적 사건을 유교적 틀로만 해석함으로써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동학농민운동의 발생 원인을 조선이 처한 봉건적 체제의 모순에서 찾지 않고, 단순히 호남 지역의 모순으로만 파악하였다. 앞에서 살펴본「갑오평비책」도 여러 가지 모순을 극복하고자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백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하는 미온책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조선 민중들의 저항을 진압한 일본군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동학농민운동을 경험하면서 매천은 세상을 보는 창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은 책 속의 글을 통해서 세상을 보았다면, 이제는 꿈틀거리는 세상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이러한 세상의 변화를 역사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서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한 때를 시작으로 삶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치열하게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나라 근대사 연구의 필독서라 할 수 있는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천이 그토록 증오하던 ‘동비들의 난’이 있었기에 매천은 불세출의 역사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