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집』 발행은 곧 독립운동이었다.
『매천집』 발행은 곧 독립운동이었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7.19 09:53
  • 호수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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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28>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말씀드립니다. 전일에 보내 주신 글을 지금까지 답을 못하여 죄송함을 어찌 다하겠습니까? 이제 박창현씨가 오셔서 요사이 여러분의 동정을 살피고 매천집이 거의 끝나가는 데 재정이 군색하여 여러분의 고민이 적지 않다고 하니 무슨 말로써 그 만분의 일이라도 위로해 드리겠습니까? …… 넉넉하지 못하나 10원을 장부에 기록하고 5원만 먼저 부치오니, 나머지 5원은 다음 편을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사정을 살펴 용서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남원의 박해창은 뒤늦게 참여하게 되어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거금 10원을 기부하였다. 단 5원만 먼저 부치고 나머지 5원은 다음에 보내겠다고 용서를 구하고 있다. 경제 사정으로 2회 분할 납부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미안하였던 것이다. 가슴 훈훈한 이야기다.

물론, 모든 지역에서 이렇게 협조한 것은 아니었다. 모금이 잘 안 되는 지역도 있었다. 1911년 음력 12월 7일, 전남 여수 지역의 모금 책임을 담당한 김중우가 왕경환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을 보면 사정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모금의 일은 몇몇 벗들에게 힘써 권해 보았는데 일에 호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비웃는 자가 또한 많으니, 세상이 뜬구름같이 변하고 인정이 물결같이 번복하는 것이 어찌 이렇게 극에 다다랐는지요? 다만 애석하고 탄식할 따름입니다.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여수 지역의 상황은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모금이  힘든 지역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 이상이었다. 전국에서 267명의 선비들이 1인당 적게는 20전(錢)-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를 기준으로 보면, 3개월 동안 금연을 하면 모을 수 있는 금액이 20전 이었다-에서 많게는 30원(圓)의 성금을 낸 것은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가난한 선비들이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본 헌병의 눈초리를 피하며 모금에 응하였던 것이다. 총 491원의 성금을 모아 8회에 걸쳐 중국 회남의 김택영에게 470원을 송금하고, 나머지 금액은 우편비용, 회의비용 등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황원이『매천집』간행을 위해 낸 금액은 확인되는 것만 232원이었다. 이처럼 『매천집』발행 주역의 자기희생이 있었기에 여러 사람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매천집』 간행,
그러나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1911년 말,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 덕택에 중국 회남의 한묵림인서국(翰墨林印書局)에서 전 7권 3책의 『매천집』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서 국내의 선비들에게 배포하는 문제가 있었다. 1912년 음력 3월 5일, 김택영이 왕수환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그쪽 비용이 조금 더 드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개성 북부 연동 왕성순(김택영의 제자)의 집으로 합쳐 보내니, 그대는 큰 대바구니 두 개를 가지고 가서 받을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귀하의 선조 현릉을 참배하고 ……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매천집』은 500질을 간행하여, 50질은 중국에 반포하고, 450질은 국내로 보냈다. 김택영은 비용이 조금 더 들고 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방법을 택하였다. 먼저 개성에 있는 그의 제자 왕성순에게 보내면, 구례의 왕수환이 개성으로 가서 가져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왕수환의 본향이 개성이니 이참에 선조의 능을 참배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냐고 너스레를 떨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매천집을 압수당하였다. 속이 상한 김택영은 왕수환에게 “『매천집』은 어찌 일찍 반포하지 않고 압수를 당하게 합니까?”라고 항의성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조선총독부의 압수가 계속되자, 1913년 이후에는 일단 중국 안동(安東, 단둥)으로 보낸 다음 다시 압록강을 건너와 신의주에서 우편으로 부치는 방법을 택하였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매천의 동생 황원은 『매천집』을 압수 당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는 이것을 되찾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919년 음력 4월 10일, 황원이 왕수환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제가 우선 꾀할 일은 압수된 『매천집』을 빼내는 것인데, 형이 빼앗긴 부수를 알지 못하겠으므로 속히 편지로 알려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먼저 구례 건을 빼내고, 다음 서울에 머물러 있는 것을 빼낼 계획입니다.

먼저 구례에 있는 것을 찾고, 다음에는 서울의 것을 찾을 계획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1920년 무렵 황원은 조선총독부에 『매천집』을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하여 압수당한 『매천집』의 일부를 되찾아 왔다. 그리고는 조선총독부에 감사의 편지를 보내는 당찬 여유를 보이기도 하였다. 과연 그 형에 그 동생이었다.

『매천집』,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가 되다

매천 유집 간행의 5인방에 속하였던 박창현은 『매천집』권수(卷首)에 실린 ‘평어(評語)’에서 이렇게 평하였다.
시(詩)는 이치와 기력과 성향(聲響, 소리의 울림) 세 가지를 갖춘 뒤에 바야흐로 명가(名家)가 된다. 이제 매천선생의 시를 보니 그 이치의 정밀함이 봄누에가 고치를 만든 것 같고, 기력의 굳셈이 장사가 집을 쳐부수듯 하고, 소리의 밝음은 애절한 비파 소리가 집을 울리는 것 같으니, 시가 이와 같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 가히 천고에 전할 만한데 하물며 겸하여 높고 높은 큰 절개가 있었음에랴.

매천은 그야말로 시의 명가라 할 만한데, 거기에 높은 절개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최고의 찬사를 하고 있다. 『매천집』 편찬의 주역이 하는 평가이니 당연한 칭찬이겠거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매천집』을 읽은 다른 선비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1913년 11월 20일, 전남 영광의 선비 이강제가 왕수환에게 답한 편지를 보자.

서해 쪽 일대는 『매천집』의 문풍이 크게 세상에 유행하여 서로 다투어 책을 빌려가 『매천집』은 책상에 머물러 있을 때가 적으니, 반년이 못가서 책장이 닳아 떨어질 것이고, 몇 해가 지나면 거의 읽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강제의 표현에 의하면, 『매천집』은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앞으로 스테디셀러가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선비들의 반응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전국적 유명도를 지니고 있던 김윤식(1835~1922), 유길준(1856~1914), 장지연(1864~1921) 등도 『매천집』을 보고서는 매천에 대한 존경과 자신들의 나약함에 대한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