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쇠 약수 지계마을에서 드세요”
“고로쇠 약수 지계마을에서 드세요”
  • 박주식
  • 승인 2011.02.14 10:26
  • 호수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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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일 생기면 똘똘 뭉치는 것이 최고의 자랑

마치 한 마리 백학이 날개를 활짝 펼친 듯 백운산 억불봉은 수어천을 감싸 안고 억겁의 세월 생명수를 흘려보낸다. 백운산 4대 계곡 중 가장 깊고 수량이 많은 수어천은 백운산이 빚어낸 최상의 조화다. 사시사철 무한한 풍요를 제공하는 수어천이 있어 지역의 삶 또한 부족함이 없으리라.

억불봉을 배경으로 수어호를 마주한 비경에 감탄하며 수어천을 따라 오르면 억불봉 동쪽자락 한편에 고즈넉한 마을이 반겨 맞는다. 진상면 어치리 지계마을. 흔히 ‘지계비’ 또는 ‘지제비’로도 부르는 이 마을은 황룡사에 부속된 인방골의 암자에 살던 중들이 빨래할 깨끗한 물을 찾아다니다가 이곳 냇물이 가장 깨끗하고 산자수려하다 하여 냇가 이름을 지계(智溪)라 이름 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이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한다. 다만 지명을 지을 땐 뭔가 뜻이 있을 것인데 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그래서 아직도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혈’ 이라는 설이나 뭔가 지혜롭다는 의미가 따로 있을 것이란 해석이 분분하다.

지계마을은 1600년쯤 황룡사의 사동(使童)인 곡부 공 씨가 절이 방화로 소실되자 갈 곳이 없게 되어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했다고 하나·황룡사가 소실된 시기이보다 늦어 최 씨가 제일먼저 입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 마을엔 천살고지 라는 곳에 용소(龍沼)라는 소(沼)가 있어 용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소는 가뭄이 들어도 물이마르지 않아 옛날 한해가 심할 때는 광양향교에서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문헌에 전해오며 30여 년 전까지도 당시 농촌지도소가 주관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 마을 우측 억불봉아래 지수골 앞쪽 절대 밭 인근지역엔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의 면적은 약1500평 정도로 절 대밭에는 4천여 평의 작설차 밭이 대나무와 함께 자생하고 있고 동백나무도 상당수 자라고 있다. 이절이 망한 것은 빈대 때문이라고 구전되어 오기도 하는데 대형 산사태나 임진왜란 시 왜구에 의해 절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곳엔 3톤쯤 되는 대형맷돌이 있었으나 1979년 산사태로 매몰됐고 지금은 한지 만드는 딱돌과 부도의 좌대가 남아있어 절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부도와 석탑의 부분석물, 주춧돌 등이 마을 주민에 의해 수집상에게 팔려나갔는데 지금도 마을주민들은 이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농가 소득 증대가 새로운 희망

입춘이 지났다지만 아직 늦겨울인 계절, 하지만 이 마을 주민들은 농한기를 잊고 바쁜 일과를 살아간다. 백운산이 주는 또 하나의 혜택 고로쇠 채취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46가구 1백여 명이 살고 있는 지계마을은 37농가가 고로쇠 채취에 나서 두 달 동안 1억 원이 넘는 소득을 올린다. 대부분의 농촌마을이 겨울철 농한기를 맞아 다음 농사를 준비하며 소일하지만 마지막 추위를 이겨내며 바삐 산을 오르내리는 지계마을 주민들에겐 고마운 소득원이다.

지계마을은 예로부터 주민 모두가 온화한 품성에 근면 성실하며 주민 간 화합이 자랑인 마을이다. 나보다 먼저 이웃을 생각하고, 마을을 생각하는 대의와 정으로 뭉쳤다.  험한 산골 마을 오지를 삶터로 가꿔가기 위한 과정에서 이웃의 소중함을 먼저 깨달은 때문이다. 이처럼 마을 주민들의 부지런함과 단결은 인근 마을보다 빠른 발전을 가능케 했다.

이미 마을에 들어선 도토리 가공공장과 최근에 준공된 대형 마을회관은 이 같은 주민 모두의 노력의 결실이기에 만족을 넘어 주민들에겐 자부심으로 자리한다.
김성부 지계마을 이장은 “지계마을은 나보다 마을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최고”라며 “비록 오지마을이었지만 지금처럼 풍족한 마을을 만든 건 이 같은 주민들의 이웃을 위하는 마음과 단결 때문”이라고 거듭 자랑한다. 이 마을 주민들이 마을 자랑을 할 때면 빠지지 않는 얘기가 있다.

지금의 마을회관에 앞서 구 마을 회관을 지을 때다. 주민들은 마을회관을 짓고자 했지만 마땅한 땅이 없어 고민이었다. 이때 주민 손복원 씨가 선뜻 자신의 논을 희사해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당시 손씨가 기부한 이 땅은 그가 어렵게 아끼고 모아 장만한 땅임을 알기에 마을주민 모두에겐 큰 귀감이 되었다.
이후 주민들은 좁은 농로를 넓힘에 자신의 땅을 주저 없이 내 놓았고 마을일에도 솔선수범해 참여함으로써 주민 모두가 스스로 하나 되는 길을 열었다.

김성부 이장은 “지금이야 시대 달라져 논보다 밭과 산에서 나는 소득이 높지만 예전엔 논농사가 최고였고 우리 마을엔 논이 적어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나무 심기였다. 고로쇠나무를 시작으로 노는 땅이 없이 밤나무와 감나무, 매실 등을 심고 수확 하게 되니 어느새 산골 오지 마을은 고소득 농촌마을로 변모해 있었다.


이 마을은 일 년 사시사철 농한기가 없다. 고로쇠 물 받기를 시작으로 고사리 채취와 매실, 감ㆍ밤 수확에 곶감까지 하다보면 어느새 한해가 다가고 다시 고로쇠 철을 맞는다.
김 이장은 지계마을의 미래를 주민소득을 더 많이 높이는데서 찾고 있다.

소득이 높아 살기가 좋으면 남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고, 젊은 사람도 다시 마을로 들어올 거란 생각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마을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제 가격을 받고 팔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한다. 때마다 최고의 농산품을 생산해 내지만 여전히 아쉬운 건 판로다.

김 이장은 “마을에서 생산된 질 좋은 농산물을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기 위해 노력해 보지만 아직은 부족함이 많다”며 “판로 문제가 해결돼 농촌 소득이 도시 직장인의 연봉을 앞선다면 도시로 나간 젊은 사람들도 부모 고생 안 시키고 다시 마을을 찾아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김 이장에겐 두 가지 바람이 더 있다. 새로 지은 회관의 경로당 인가가 빨리나 마을 노인들이 편안히 경로당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마을을 가로 지르는 도로를 넓혀 사고 위험을 줄이는 일이다. 경로당은 새 건물로 잘 지어 놨지만 노유자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인가가 안나 난방유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 마을 한복판 도로는 길이 좁고 곡선이라 경운기나 차량을 주차할 곳이 없을뿐더러 늘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다.

억불봉을 등에 지고 수어천을 품에 안은 산자수려한 지계마을. 산골 오지를 새로운 삶터로 가꾸고 가꾼 그 고단함이 결실을 맺어 이제는 부촌으로 탈바꿈한 이 마을이 떠난 이들이 다시 찾아들어 더 한층 복된 마을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한편, 이 마을 출신으론 김옥주ㆍ김선주 전 국회의원과 경찰 공무원인 신인권(경감)ㆍ강금철(경사)씨, 김태한 고로쇠약수협회장, 김필숙 광양시 우리음식 연구회장, 김병화 기아자동차 중마대리점 사장 등이 있다.                         

박주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