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규 자유기고가]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박두규 자유기고가]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 광양뉴스
  • 승인 2012.06.11 09:54
  • 호수 46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인동 도촌, 장내, 용지, 궁기, 명당 마을

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
큰 고을의 꿈과 환경의 변화

마을의 매력 사람의 향기큰 고을의 꿈과 환경의 변화태인도와 금호도는 대륙의 일부가 분리되거나 물에 잠겨 만들어진 육도(陸島)다. 그래서 호남정맥의 끝은 망덕산이 아니라 태인동의 삼봉산이라는 말이 나오고, 배알도(拜謁島)가 찾아가 떠받드는 것도 망덕산이냐 삼봉산이냐 논쟁하게 된다. 인물이 난다는 명당도 망덕산 아래에서 조재천, 삼봉산 아래에서 김보현 장관이 났으므로 두 산을 아울러 보게 한다.

 

전우치 전설의 섬이 공단이 되어

도촌 나루터는 예전 해상 교통의 관문이었다. 도의촌(道義村)이 있어 도촌(道村)이라 하여 금호도의 도촌(渡村)과 구별했다. 군머리는 임진왜란 때 수군 선봉부대가 머물렀고, 전우치 군사 주둔지라고도 한다.
장내(墻內)는 성으로 둘러싸인 곳의 안쪽이라는 ‘담안’의 한자말이다. 옛날부터 가장 큰 마을이며 태인동 행정의 중심지다. 용지는 하동고지라고도 했고, 개천둠벙에서 용이 머리를 내밀고 나왔다는 전설에 따른 이름이다. 김 씨 집성촌으로 김 양식을 처음 시작한 마을이 공단으로 뻗어간다.

궁기(宮基)는 궁궐에서 관리하던 땅이었고, 전우치가 궁을 짓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인 ‘김 시직지’가 새롭게 단장을 하고 있다.

명당은 궁기에 속하여 60년대부터 주거가 시작되었다. 띠밭섬, 짠디밭등, 명산등으로 불리다가 76년에 25 가구로 독립 마을을 이루고 명당(明堂)이라 했다.


변화의 꿈을 이룬 사람들

도촌 한두재(88) 씨는 올해 ‘남해성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16세 때 진상 입암에서 남해성의 아버지에게 인정받았던 소리의 꿈을 놓지 않은 결실이다. 일제에 징용되어 해병으로 근무하던 1년 만에 해방을 맞았고, 6.25 때는 군 입대를 기피하며 자수성가했다.

도촌 최병헌(71) 씨는 2000년 제2차 이산가족 상봉 때 북한의 맏형 가족을 만났는데, 큰형은 6.25 때 서울대 공대를 다니다가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더불어 당숙들의 활동 때문에 군사정부 시절 방첩대에 잡혀가 조사를 받기도 하며 숨죽이고 살았다.

도촌 김정희(52) 씨는 YWCA에서 주관하는 포스코 간병단으로서 1일 2명의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간병하고 말벗이 되어주면서 행복을 나눈다.

장내 장귀성(67) 씨는 이장, 어촌계장, 수협 수집소장 등을 역임했고 85년 항운노동조합 결성에 참여하여 초대 위원장을 맡았으며 90년에는 한국노총 광양지역지부도 창설했다. 집안에서 지나온 삶을 글로 정리해보는데 공해가 실감되어 이주 대책이 서야한다고 한다.

용지 큰줄다리기 보존회장 김영웅(62) 씨는 92년 복원할 당시의 사람들이 절반이나 돌아가셨고 젊은 사람들은 무관심하여 보존이 어려운데 태인동과 금호동 주민들을 참여시켜 극복해 가고 있다. 제철소에서 분진을 없애는 설비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명당 공단 조성으로 11년 12월 중마동으로 이사한 염규철(76) 씨는 마을 독립의 증인이며, 제철이 들어와서 경제적으로 나아졌으나 오염된 현실과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안았다.

<다음주는 금호동입니다. 많은 제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