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복지회관 한글교실’ 할머니들 화이팅!
‘노인복지회관 한글교실’ 할머니들 화이팅!
  • 광양넷
  • 승인 2007.06.06 13:55
  • 호수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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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필자는 지도하는 학생을 데리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유적공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광양 노인복지회관 한글 교실’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분들은 우리들이 앉아있는 주변의 탁자에 앉아 잠시 땀을 들이고 나서  받아쓰기 공부를 하시는 것이었다. 초등학생용 노트를 꺼내시고 연필과 지우개를 꺼내시는 분도 계셨다. 
 
 노트를 미처 준비하지 못하신 분들은 곁의 분들께 한 장을 찢어 달라고도 하시는 등 꼭 초등학교 1학년생들처럼 그렇게 받아쓰기 준비들을 하셨다. 저 투박한 손으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시느라 자신은 돌보지 못하셨던 분들.  가난에 찌들린 세월을 살아내느라 당신들의 이름 석 자 쓰는 것 조차 배우지 못하셨던 분들.  어깨 너머로 공책을 들여다본다. 

혹은 삐뚤빼뚤하게 혹은 정갈하게 써내려가시는 모습들이 너무나 진지해서 숨을 크게 쉬는 그것조차 죄스러워지는 기분이다. 받아쓰시는 동안 무얼 쓰라고 했는지 잊으셨는지 무어라 불렀느냐고 내게 되물어 오시기도 하고 이렇게 쓰는게 맞느냐고 물어오시기도 한다.  

이때 나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인솔해 오신 분께 명함을 한 장 주실 수 있느냐 여쭈었고 무슨일이냐고 반문하시는 분께 오늘 보았던 모습을 글로 쓰고 싶은데 혹 쓰게 된다면 보내드리마고 말씀드리고는 명함을 한 장 받았다.  다시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면서도 자꾸 뒤돌아보아지는건 너무나 진지한 자세로 받아쓰기를 하시던 모습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겨우 한글만 깨치신 내 어머니의 모습을 그분들의 모습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우리들의 지난날은 내남없이 고단하고 가난했던 날들이었다.  그속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어찌보면 딸들이고 어머니들이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그 모든것이 아들 위주로 이루어졌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딸들은 그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대처로 나가야했고 뙤약볕 아래서 김을 매고 겨울이면 호롱불 아래서 길쌈을 해야 했었다. 

내어머니도 야학을 사흘 저녁 다니고는 말만한 처녀가 밤이슬을 맞는다는 외할아버지의 불호령과 함게 책이 아궁이에 불살라지는 일을 겪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명민하셨던 어머니는 그 사흘로 한글을 깨치셨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아궁이앞에서 내게 한글을 가르치실 수 있었던 분이다. 그런걸 보면 내 어머니는 지금 뒤늦게 한글을 배우시는 분들보다는 조금 더 선택받은 삶이셨는지도 모르겠다.

연세를 여쭙자 일흔이라고 하셨던 할머니(가운데 푸른색 윗옷을 입으신 분).  제 친정어머니도 일흔이라고 말씀드리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분의 손은 꼭 내어머니의 손처럼 투박하고 내어머니처럼 아직도 바지런하신 성품을 내려놓지 못하시는지 손끝이 거칠다. 곁에서 나는 일흔 넷이라며 웃으시는 할머니의 웃음이 꼭 초등학생처럼 해맑고 고우시다. 

내가 내 어머니께 처음 글씨를 배울 때 꼭 저렇게 또박또박 썼으리라.  세월이 흘러 글씨에도 연륜이 스며들고 때론 멋에 겨워 때론 바쁘게 쓰느라 휘갈겨 쓰는 그것조차도 지금은 제대로 하지않고 키보드를 두들기는게 다반사인데 그분들의 글씨를 보고 있으면서 어린날처럼 나도 거기 함께 앉아서 받아쓰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저렇게 진지하고 열심인 자세로 삶을 대하는 자세조차 잃어버린지 오래된 것 같은 게으른 내가 거울에 비춰진 듯 싶어서 부끄러웠고 지금이라도 글을 배운다는 기쁨을 가지신 그분들의 모습이 5월의 하늘처럼 싱그럽기만 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아마도 그분들은 제대로 읽고 쓰기를 하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니 쓰는건 어려워도 아이들 동화책쯤은 너끈하게 읽어내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럴때까지 모두 건강하게 지금처럼 빛나는 날들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램해 본다.